요즘 핫해진 미나리.
처음 영화 제목이 뉴스에 올라올 때에는 특별히 관심을 가지진 않았었는데, 윤여정배우님이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시면서 결국 나도 궁금한 마음에 영화관을 찾았다. 코로나 때문에 오랜만에 찾는 영화관.
영화 보기전에 내용 스포가 되는 글들은 일부러 피했는데, 그래도 평점에 써있는 후기들 몇몇이 읽히긴 했었다. 따뜻하고 감동이라는 말들도 있지만 생각보다 스토리가 별거 없다 지루하다는 말들도 있고..... 그래서 일부러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보러갔다. 그리고 보고 나와서 결과적으로 내게 이 영화는, 어느 정도의 기대를 했더라도 충분히 충족되었을 작품이었다.
아래 내용부터는 내용 스포가 있기 때문에 혹시 이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들은 읽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마도 '미나리'가 지루하다거나 스토리가 그저 그렇다고 느꼈던 분들은 평소 기승전결 드라마틱한 영화들을 즐겨보는 취향이지 않을까 싶다. 옆집 이야기처럼 잔잔하고 현실적인 일상, 그안에서 소소하게 반짝이는 감동을 좋아하는 내게 있어서 이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름답게 그려진 완성도가 높은 작품처럼 느껴졌다.
영화 제목이 딱 단순명료하게 '미나리'인 것과, 영화 속에서 데이빗이 미나리로 아무렇게나 노래를 지어 부르고, 그렇게 지은 노래를 할머니가 데이빗을 달래줄 때 불러주고, 영화가 끝나갈 때쯤엔 그동안 공들인 것들이 불에 타며 허무함이 덮치지만 그러고도 할머니가 심어 아무렇게나 참 잘자란 미나리가 가득한 곳을 비추는 것.
할머니의 '스트롱보이'인 데이빗과 다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하는 아버지 제이콥이 한가득 자란 미나리를 캐면서 끝나는 것이, 모순적인 말이지만 농사를 지어 성공했다는 전형적인 해피엔딩보다도 더 '현실적인 희망'을 찾게하는 결말인 것 같다. 제이콥이 농작물을 잘 거두고 원하는대로 성공하며 영화가 끝났다면 딱 드라마스러운 해피엔딩에 도달하는 대신 데이빗 가족의 다음에 대한 생각은 덜들었을 것 같다. 행복하게 끝났으니까. 반면 모든게 불타면서 관객으로 보는 입장에선 '어떡해...' 안타깝고 마음이 썩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미나리를 비추는 장면을 보며 그들 가족의 다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현실적인 여운이 남고 희망이 있으리라 믿고 싶어지는.
관객입장에선 굳이 희망을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해피엔딩 vs. 관객입장에서 굳이 희망을 바라고 생각하게 되는 현실.
데이빗의 '할머니 같지 않던' 씩씩하던 할머니가 뇌경색(우측 팔 마비와 관절구축이 오고 우측 발을 끌면서 걷고 언어가 서툴러진 것을 보아 좌측 중대뇌동맥쯤으로 시나리오를 썼던게 아닐까)이 와서 정말 간호가 필요한 노인 할머니가 되어버리고, 농작물이 모두 불에 타고, 이런 비극들이 연달아 덮치기 전까지는 웃을 포인트도 많은 영화였다. 윤여정배우님이 조연상을 타셨지만 내눈에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부부가 아니라 데이빗과 할머니 둘처럼 보였다.
일단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이 대부분 웃음 담당이었다. 할머니가 화투를 가르치는 모습(나중에 데이빗이 친구와 치면서 할머니의 거친 말투를 따라한다ㅎㅎ), 데이빗이 소변 못가리는 걸 놀리는 할머니(딩동 브로큰), 할머니에게 소변을 먹인 데이빗, 데이빗이 혼날 때 회초리 대신 강아지풀 같은 걸 들고오는 귀여운 모습 등등...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에 몇 가지 변화들이 대조되며 보인다.
선천성 심질환으로 뛰지말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했던 데이빗의 심장 구멍은 줄어들어 할머니가 말했던 '스트롱보이'가 되지만, 처음에 강해보였던 할머니는 뇌경색을 겪으며 한순간에 간호를 필요한 노인의 모습으로 무너져내린 것.
처음 만났을 땐 할머니를 싫어하고 멀리하던 데이빗이, 끝에는 집과 반대로 가는 할머니의 앞을 막아서며(더 튼튼해진 심장으로 뛰어가서!) 같이 집으로 가자고 애정을 보여주는 모습.
심장때문에 정말 죽을까봐 겁나할 때 걱정말라고 할머니가 안아 토닥여주고 다리를 찧어 할머니가 치료해주었던 꼬꼬마 손자는, 영화 끝에서는 절망에 빠져 초점을 잃고 걸어가던 할머니의 손을 잡아 집으로 이끄는 진짜 할머니의 스트롱보이가 되어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결말에 있어서 '농사의 성공'을 보지 못한 것보다 '뇌경색을 맞은 후 할머니의 웃음'이 다신 보이지 않은 것이 서글펐다. 할머니가 다시 귀여운 손자 스트롱보이 데이빗을 통해 웃는 모습까지는 보고 싶었는데...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도 할머니와 데이빗이 뱀이 나올 수 있다는 물가에서 있을 때 나온 내용이다.
뱀이 나타난걸 보고 데이빗이 돌로 치려고 하니까, 그러면 뱀이 숨으니까 가만히 냅두라고 하면서
"보이는게 안보이는 것보다 더 나은거야. 숨어있는게 더 위험하고 무서운 거란다" 라고, 정확한 대사는 기억안나지만 이런 뉘앙스의 할머니 연륜이 묻어나는 말을 한다. 보면서 속으로 한참 끄덕거리게 되는 말이었다.
정말 무서운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 가족안에서 여러 역경을 통해 점차 위태로워져가는 부부 사이도 그렇고, 예고도 없이 한순간 할머니를 무너지게 만든 뇌경색과, 예고도 없이 한순간 모든 걸 불태워버린 화재. 닥치기 전까진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았던, 예고없이 불쑥 찾아오는 것들.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들. 조용히 숨어있는 것들.
보이지 않는 영화 결말의 뒤로 제이콥 가족은 여전히, 아니 어쩌면 처음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씁쓸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공들였던 농작물이 모두 불타 새로 시작해야 하는 와중에 간병이 필요한 할머니까지 더해져서. 그렇지만 스크린 밖의 우리가 살고 있는 곳도 물흐르듯 해피엔딩인 원더풀 스토리가 아니라 현실이니까... 제이콥 가족들이 서로 가지고 있는 애정으로 앞으로도 꿋꿋이 이겨나갈 거라고 믿고 싶고, 어디에서든 잘 자라는 원더풀 미나리처럼 제이콥 가족이 그렇길 바라며 더 애정의 점수를 주고 싶다. 돌이켜보면 이 영화를 보며 나를 웃게 만든 것 중에 가족의 성공 스토리는 단한구석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냉정하고 잔인한 현실 결말에도 불구하고, 영화속에서 나를 웃게 만들고 따뜻하다는 감정을 느끼게 만든 건 온전히 제이콥 가족이 가지고 있는 힘인게 분명하다.
'다시보기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노말리사 - "드디어 당신을 찾았군요" (0) | 2020.08.08 |
---|---|
미드나잇 인 파리 - 사랑이 유지되려면 필요한 것 (0) | 2020.07.26 |
토이스토리4 - 우디와 포키, 달라보이지만 비슷한 삶의 여정 (0) | 2020.07.26 |
코코 - '부재'와 '무'의 차이 (0) | 2020.07.26 |
벌새 -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0) | 2020.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