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시보기/영화

아노말리사 - "드디어 당신을 찾았군요"

'아노말리사' 이 영화의 평점과 시놉시스만으로도 궁금했지만 이 영화를 보게 되었던 더 큰 이유는, 좋아하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이 연출을 맡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영화 연출법이 요즘 많이 보아온 예쁘고 자연스러운 픽사 애니메이션과 조금 다르게, 스톱모션 기법을 사용한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점에서도 독특한 느낌을 준다. 애니메이션이긴 한데 사람과 유사하게 만들어놓고 눈 옆으로 봉제인형 혹은 조립한 로보트 같은 선을 그어놓아서 '자연스럽지 않은 사람'의 느낌을 준다. 영화 뒷부분에 주인공이 자신의 꿈속에서 충격받아 도망치던 와중에는 눈 아래로의 그 얼굴이 떨어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얼굴을 가면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아노말리사' 라는 제목의 뜻은 아노말리 + 리사, 리사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마이클이 사랑하게 되는 여자의 이름이다.

Anomaly + Lisa = ​이례적인 + 리사, 즉 특별한 존재인 리사를 의미하고 마이클이 리사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붙여주는 이름. 

 주인공 마이클스톤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남부럽지 않을 경제적 여력과 사회적 지위를 갖춘 중년 남성이다. 가족과 자녀가 있고, 베스트셀러 <고객을 어떻게 대할까(How may I help you them?)>의 저자로 성공하여 강연을 다니며 똑똑하다고 존경받는다. 리사도 마이클이 강연을 위해 신시내티로 1박2일 출장을 와서 호텔에 들어왔다가 만나게 된다. 그의 강연을 듣고 싶어 멀리서 와있던 팬이었으니까.

 호텔 이름도 재미있는데 프레골리호텔('프레골리 증후군'이란 한 사람이 다른 여러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자신을 박해한다고 믿는 정신증의 일종). 이 영화에서 마이클에게 보여지는 세상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영화 내용은 마이클 1인칭의 시선에 맞추어서 흘러가는데, 그에겐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 여자들의 목소리마저 단 한 명의 같은 인물 목소리로 들린다.

 영화 초반에서는 여자들의 목소리마저 동일한 남자 목소리, 서로 다른 남자들도 한 명의 동일한 목소리로 나와서 괴기하기도 하고 무슨 연출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리사가 등장할 때 유일하게 다른 여자의 목소리로 나타나고 마이클이 그 목소리에 사랑에 빠지면서 모두가 '그에게 특별한 리사'를 보여주는 장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마이클 스톤은 처음부터 리사를 만나기 전까지 일관적으로 '지치고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상태'로 보여진다. 술담배에 버릇처럼 의존하고 정작 '전문적인 고객서비스'에 대한 베스트셀러를 내고 강연을 하면서도 본인은 진정한 소통으로부터 단절되어있다. 가족과도 형식적인 대화를 하고 그 가족들의 목소리 또한 지겹게도 들리는 동일한 목소리일 뿐이며, 호텔에서도 형식적인 대화가 끝나면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고, 영화에 자주 알아듣기 힘든 소음이 깔리는데 그에게 주변 사람들의 말이 모두 소음처럼 들리는 것을 의미하나 싶었다.

 그는 출장을 와서 가족이 있음에도 모두에게 존경받음에도, 정작 미칠듯한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고 옛 연인 벨라를 불러내게 된다. 역시 그런 정신 상태로는 적절한 소통이 되지 않고 욕만 먹은 채 헤어지게 되지만. 

 

처음 사랑했던 그 모습이 사라졌다면 그건 착각이었을까, 변해가는 걸까?

마이클은 자신이 모두를 잃어가는 불행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때 특별했던 사람도 결국 남들과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대다수 중 한 명이 되어버리고 벨라도 그 중 한명이었을 것이다. 그럼 정말 벨라가 특별했다가 그저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린걸까, 마이클이 변해버린걸까, 둘 다일까. 아니면 사실은 처음부터 특별했다는 것이 착각이었을까.

벨라는 오랜만에 불러낸 마이클에게, 깊은 연인 관계에서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떠났었던 상처를 기억하고 원망한다. 

벨라: "왜 날 떠났어?" 
마이클: "모르겠어 설명을 못하겠어"  
벨라: "그리웠어"
마이클: "나도" 
벨라: "노력해봐" 
마이클: "뭘?" 
벨라: "설명하려고 노력해봐"
이 말에 마이클은 어쩌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며 얼버무린다. 그리고 지금도 도망치고 있는 중이라고.

벨라: 우린 정말 특별했잖아 
마이클: 맞아 하지만 상황이 변했어
벨라: 느닷없이 갑자기? 자기한테 정말 화났었어
거기에다가 마이클은 '너가 변했었는지'를 알고 싶어하며 벨라를 더욱 화나게 만든다.
마이클: 네가 변했다고 생각해?
벨라: 무슨 말이야?
마이클: 내가 널 바꿨느냐고 어떤 면이건 변한게 있어? 우리가 함께하는동안 말이야 너가 바뀌었어?
 

벨라는 저런 모습의 마이클에게 무섭게 왜이러느냐고 말하고, 그래도 우리에게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았더냐며 외롭다고 방으로 데려가려는 마이클에게 욕을 하고 떠난다. 그뒤로 "이해하고 싶을 뿐이야!!!!" 라고 외치는 마이클의 말은 진심인 것 같다. 마이클이 이해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벨라와의 무너진 관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 모두가 로보트 같은 하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듯한, 이 세상 안에서 잃어버린 소통의 방법 같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똑똑하고 성공한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강연자로 지나갈 때에도 '마이클 스톤이다!'라고 알아보지만, 그에게는 그들이 불편할 뿐이다. 마이클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여러 사람들 안에 있어도 줄곧 혼자인듯 보이고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게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마저 '모두 동일한 목소리'로 들리는 사람들 목소리에 지칠 무렵, 극적으로 다른 목소리를 가진 리사가 등장한다. 방 밖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듣고는 마이클은 호텔방 하나하나를 두드리며 친구를 찾는다고 뒤져내다가 드디어 리사를 찾고 자신의 팬으로서 이미 호감을 가지고 있는 그녀와 친구에게 술자리를 제안한다. 리사는 사실상 눈 옆에 흉터도 있고 사회적 지위가 낮으며 돈도 많지 않아 자존감이 떨어져있는 여자다. 자신의 말 한마디를 던져놓고 'shut up Lisa'를 되풀이하며 자신이 바보같다고 생각하고, 마이클과 만나 대화하는 자체를 행운처럼 여긴다. 반면 마이클에겐 그녀의 어떠한 조건도 상관없이 '남들과 다른 목소리', 자신에게 '특별함'을 가진 그녀에게 단번에 사랑에 빠지고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날 바로 아내를 떠나 평생 함께 하고 싶다며 사랑을 고백한다.

마이클은 잘 울지 못하는 남자다. 매일 지쳐있는 듯한 표정 뒤로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없고, 영화 끝 강연에서도,

'울고 싶은데 울 수가 없네요. 우울증약 때문인가요?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지는데 아무것도 안나오네요. 저를 둘로 갈라서 악몽에서 벗어나게 할 눈물이 필요해요.' 라고 말하면서도 눈물은 흘리지 못한다.

그런 마이클의 변화를 보여주는 점은 리사를 만나 남들과는 다른 그 특별한 목소리로 노래를 들을 때 눈물을 흘린다는 점이다. 리사는 감성적이시다며 놀라지만 마이클은 당신의 특별한 목소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이클의 눈빛은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깊은 감격으로 리사를 보고 있는지 느끼게 한다. 끝없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또는 끝을 모르는 어두운 터널에서 빛줄기를 발견한 것처럼. 그는 "드디어 당신을 찾았군요" 라고 하며, 자신을 이 지겹고 권태로운 일상들과 관계들과 목소리들로부터 구원해줄 리사를 지켜내고 평생을 함께 살아나가야 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행복을 겨우 찾았다고 생각한 마이클에게 결국 같은 일은 되풀이되는 것이었다. 그는 꿈속에서 자신과 리사 관계를 무너뜨리려는 동일한 목소리의 사람들에게 쫓긴다. 이 꿈속에서 도망치며 달리는 마이클의 눈 아래 얼굴이 가면처럼 떨어져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악몽에서 깨어 다음날 리사에게 평생 함께하자는 고백을 하고 리사가 응답을 한 순간부터, 갑자기 그의 눈앞에 '다른 리사'가 보인다.

그녀가 음식을 입안에 넣고 말하는 모습이 거슬리고, 포크가 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소음처럼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점차 특별하던 그 리사의 목소리에, 지겹도록 들어온 동일한 남자 목소리가 겹쳐 들리기 시작한다. 그 앞에서 마이클의 표정은 또다시 좌절로 일그러진다. 분명히 특별했던, 드디어 찾아냈다고 감격했던 리사라는 존재가, 그가 듣기 싫은 목소리를 가진 수많은 누군가들 중 한 명으로 점차 변해간다고 느낀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늘 완벽하고 똑똑한 모습'이었을 마이클이 청중들 앞에서 강연 중에 자기 자신의 심적 갈등을 중간중간에 끼어 고백하며 강연의 일관성이 무너지고, 야유를 받기도 하는 등 더이상 태연하지 못한 모습이 보여진다.

"살아있다는 것은 뭘 의미할까요? 잘 모르겠어요. 아픔이 뭔지 저도 몰라요. 살아있는 게 뭐냐고요? 저도 모르겠어요."

울고 싶다는 말과, 미소를 지으라는 말을 반복하며 이중적인 대사를 반복하다가 결론은 다시 상냥하라고 말을 한다.

"개개인에게서 특별한 점을 찾으세요. 대화하면서 그 점을 찾아보세요. 
우린 시간이 한정돼 있다는걸 자주 잊곤 하죠. 곧 죽음을 맞게 될거에요. 
다들 어딘가에는 사랑할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나는 아직 중년의 나이가 되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40-50대쯤이 되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호르몬 변화와 함께 갱년기 증상이나 우울증, 성격변화 등을 겪는다고 한다. 사실 크고 작은 차이일 뿐이지, 우리 인생에는 어른일 때뿐만이 아니라 더 어릴 때에도 한번씩 '자신의 삶과 자신의 모습에 의문을 던지는' 순간이 자주 들이닥치지지 않나.

내게도 정신없이 꿈을 향해 달리다가, 30대가 되어서 또한번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내 모습과 보여지는 모습, 그리고 내가 서있는 위치 등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시간들이 많았던 것 같다.

 

아노말리사에서 모든 주변인들의 목소리가 동일하게 들리는 마이클의 모습은, 많은 것을 성취해냈지만 그만큼 많은 관계들 속에서 진정한 관계와 소통 vs 형식적인 관계 뭐가 뭔지 헷갈리게 되고, 바쁜 일상을 여유있는 휴식 대신 술담배로 버텨나가는, 도시 어디에라도 있을법한 직장인들을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질 때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텐데, 그에게 리사는 지겹도록 동일한 목소리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여인이었다. 그렇지만 (마이클의 시점에서)그녀의 목소리 역시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 변해가며, 이에 포크가 부딪히거나 음식을 씹는채로 말하는 거슬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랑은 그럼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특별해야 권태 속에서도 살아남는걸까. 마이클은 그동안 늘 자기 내면의 한계로 인해 특별한 사람들을 잃어온 것 아닐까. 그는 '모두가 결국 다 비슷하게 변해간다'는 실망과 좌절 대신에 쉽게 질리고 권태로워지는 자신의 문제가 아닌지 되돌아본 적이 있을까. 사실 사람들이 모두 변해가는 것은 맞지만, 그래서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처음과 달리 변해가는 점도 분명히 있긴 했겠지만, 마이클 자신부터도 그 '변해가는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겠지만 마이클이 겨우 찾은 리사를 또다시 포기하고 떠나는 점에서는 안타까웠다. 그가 지금 이룬 가정을 깨는 불륜자가 되길 원한 건 아니지만, 마이클은 리사를 통해서 이제는 깨달았어야 한다. 또다시, 특별하다 믿었던 사람들이 지겨운 일상의 부품으로 변해간다며 그것을 자기 불행으로만 몰고 있다면 그는 영원히 그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노말리사'는 마이클에게 분명 아내를 버리겠다는 극단적이고 충동적 결심을 단번에 하게 만들 정도의 특별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포기하고 떠난다. 전연인 벨라에게 말했었듯 '상황이 변했다'는, 리사 입장에선 잘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그리고 집에 돌아온 마이클 표정에는 여전히 행복함이 없다. 그러면서도 청중들 앞에선 강연하며 모두에게 미소를 지으라고 하고 사랑을 찾으라고 믿으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장면들은 마이클의 시점에서 그려지고, 영화에서 모두 한 목소리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현실'이 아니라 '마이클에게의 현실'일 것이다. 그는 리사와 나란히 누워 소소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리사가 카페에 가서 뭘 먹었는지, 뭘 타고 왔는지 등 정말 일상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한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행복하지 않던 마이클의 행복에, 사실 더 값비싼 무언가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다. 그가 그저 소소한 일상 대화로도 행복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리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처음으로 지겹고 또 지겨운 목소리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나가야 하는 현실은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루하게 반복되는 권태로운 일상이기가 쉽다. 그 안에서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느냐는, 그가 호텔방을 뒤져내며 찾아냈던 리사의 목소리처럼, 자신에게 특별한 것들을 자주 찾아내고(노력이 필요하다) 그후로 또 반복되는 권태 속에서 그것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자기 내면의 힘 아닐까. 

 

영화 마지막은, 집에 돌아온 마이클이 리사와 비슷하게 눈 옆에 흉터가 있는 인형의 노래를 쓸쓸한 모습으로 듣는 장면 뒤로, 리사의 편지가 읽혀나가며 끝난다. 마이클을 리사에게 반하게 만들었던 그 특별했던 목소리로.  
"마이클, 당신이 떠나서 슬프지만 이해해요.

아니 이해는 안되지만 받아들일게요. 함께 보낸 시간이 있어 행복했어요. 그런 사랑은 처음 느껴본 것 같아요. 언젠가 더 좋은 상황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겠죠. - 사랑하는 리사 '아노말리사' 헤셀먼
추신: 일영사전에서 '아노말리사'를 찾아봤어요. '천국의 여신'이라는 뜻이래요. 제가 꼭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흥미로워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