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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기/영화

코코 - '부재'와 '무'의 차이

얼핏 영화 티저에서 기타치는 소년의 모습을 보고 '음악영화인가? 재밌겠다' 생각은 했었는데 바로 보지 못했었다가, 요즘 한창 영화를 집에서 찾아보기 시작해서(코로나 언제 끝날까..) 드디어 코코까지 보게 되었다.

예상했던 음악 영화와는 달랐지만, 이 영화를 본 후 요즘 일할 때마다 유튜브에서 코코 ost 반복듣기를 하며 아직은 지겹지 않을 정도로 OST들도 좋다. 

이 영화는 가족간의 사랑, 또 영원한 사랑, 꿈을 향한 용기 등등 따뜻한 메시지들을 품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깊이 생각해보게 하는 건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인 것 같다. 몇몇 영화 후기글들을 읽어보다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다면 저승세계에서조차 완전히 사라져버리게 되는 컨셉이 불편했다'는 후기도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구도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는 순간부터 완전히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저승세계에서조차), 그리고 죽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진을 제사상 위에 올려주지 않으면 이승으로의 입장권조차 받을 수 없다는 그런 컨셉이 어찌보면 정말 잔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존재의 의미라는 게 사실상 그 잔인함과 가깝지 않은가 싶었다. 그러니까 기억될 수 없다면 존재하지만 존재하는 게 아닐 수도 있는 그런 것.

 개인적으로는 가족과 친척의 종교에 따라서 제사를 지내본 적은 없지만, '죽은 사람을 기억하고 기리는 행위'가 꼭 제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때때로, 어느 이유로든,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때가 있으니까. 그것으로 그 사람은 기억되어지는 중이니까. 여러 사람의 여러 기억들로.

 이 영화에서는 제사지내는 날 이승에서 사진이 올려진 조상들만 이승에 재입장할 수 있다. 사진이 올려져있지 않고 누구도 기억하지 않기로 한 조상은 이승에 입장할 권리를 박탈당한다. 물론,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때 이승에 살았던 그 존재가 없었던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승과 저승 사이의 규칙은 '존재 여부 사실'보다는 '존재했던 의미'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을 인정을 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본인의 육체 자체로도 자기 존재를 증명해낼 수는 있는데, 죽은 사람은 그 육체가 더이상 없다. 육안으로 확실하게 존재 증명이 가능한 육체가 없는 것이고 그때부터 자신이 존재했음을 주장해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남겨진 사람들이다. 혹은 간접적으로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남긴 무언가. 그게 자식이자 가족일 수도 있고 자신이 만들어낸 글이나 예술작품일 수도 있고. 헥터에게도 가족들마저 사진에서 오려내버리고 모두가 자신을 잊어갈 때에 딸을 위해 만들었던 노래가 있었다. 치매에 걸린 코코도 결국 그 노래를 통해서 다행히 아버지를 기억해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존재의 증거'가 내가 죽은 후로도 남아있다는 것은 마냥 '당연한 일'만은 아니다. 내가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죽어서 육체마저 사라진다면 그 무엇이 한때 내가 존재했음을 증명해낼 수 있을까. 분명히 나는 존재했는데.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굳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필요해?' 라고. 그건 개개인의 인생철학에 달려있는 취향(?)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잊혀져간다는 것'이 슬픈 일이라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코코 = '기억하는 존재'

영화 제목이 '코코'인데 사실상 이 영화에서 코코는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영화 전체의 지분을 보자면 열심히 뛰어다니는 미구엘, 그리고 미구엘의 음악을 말리고 싶어하는 가족들, 저승에서 만나는 친척들, 심지어 미구엘을 쫓아다니는 강아지보다도 코코가 등장하는 씬은 적다. 그런데 제목을 코코로 지은 이유는 뭘까. 영화제목에 오직 이름만 단순하게 따넣을 정도라면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진짜 주인공이 코코이기 때문일텐데, 그렇다면 코코는 그만큼 적게 등장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게 더 강조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헥터'를 기억해주는 존재. 

나는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누군가 이 영화를 보고 울었다면 99% 모두 같은 장면에서 울었을 거라고 꼽을 수 있다. 미구엘이 코코에게 헥터의 노래를 들려주고 코코가 아버지를 기억해내는 장면. '이래서 눈물이 나는구나'라는 생각도 하기전에 먼저 눈물부터 났다. 가족들 모두가 음악 때문에 가족을 배신했다며 헥터를 외면하던 와중에 자신을 사랑했던 아버지라고 기억하는 딸 코코에 의해서, 헥터가 자신에게 불러줬던 노래를 통해서, 헥터가 기억되는 순간. 헥터가 존재의 의미를 찾는 순간. 노래 가사도 하필 '기억해줘'인데 내가 떠나도 기억해달라고. 치매에 걸린 코코에게도 그 사랑이 담긴 노래만은 기억과의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누구에게나 타인에 대한 기억과는 각각 다른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이든, 그 사람만의 향기이든, 특정한 말투이든, 그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그 사람만의 무언가.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이 나서 조금은 울게도 되었다. 나도 종종 그냥 어쩌다가 한번씩 할아버지, 할머니 기억이 스칠 때가 있다. 할머니가 "이런 걸 너희들이 신으려나?" 하며 조금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건네주시던 빨간 양말을 받으며 '정말 이건 안신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나, 할아버지댁에 놀러가면 무심한듯이 먹으라며 건네주시던 과자. 평소엔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과자인데 어색한 할아버지댁에 가선 그걸 그렇게 또 맛있게 먹었던 기억들. 그 당시엔 아무 무게감도 없는 순간들이었는데 그분들이 떠나고 난 후엔 조금은 이상하게 되새김질 되고 그렇게 무게를 가지는 기억이 되어버린다.

그들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했었는지조차 어릴 때 기억은 가물가물한데도, 내 눈앞에서 보았던 존재들이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위에 없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 한 켠이 울렁거릴 때가 있다. 

 

'부재'와 '무'의 차이

최근에 읽고 있는 'A가 X에게'라는 책 안에 이런 구절이 있다.

'부재가 무라고 믿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을 거에요.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시간에 관한 문제죠.(거기에 대해선 그들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무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고, 부재란 있다가 없어진 거에요. 가끔씩 그 둘을 혼동하기 쉽고, 거기서 슬픔이 생기는 거죠.'

 

존재의 죽음이라는 건 그런 것 같다. '부재'이지 '무'가 아니다. 그냥 이 세상에 없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 '있었다가 없는' 부재다. 슬픔은 거기에서 온다. 부재하지 않을 때, 존재할 때의 그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는데 존재 자체는 이 세상에 더이상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원래 없었던 것은 슬프지 않다. 기억할만한 원본도 없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야속하게도, '원래 당연스럽게 있는 것'보다 '있다가 없어졌을 때'부터 더 기억을 잘 하게 되고 그때에서야 '있던 동안의 소중함'에 대해 복수라도 당하듯 아프게 깨닫게 되기도 한다. 사실 늘 존재하는 것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살기란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내일 당장 사고로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그 존재의 소중함을 그런 식으로 매일 기억하며 살기란 마음이 너무 힘들고 버겁다. 당장의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일도 쉽지만은 않은데 그 와중에 우리 마음은 그런 심적인 부담까지 감당해내고 싶진 않을 것이다. 어버이날 스승의날처럼 누군가를 기리는 날이 매년 공식적으로 정해져있는 것은 어쩌면 그런 우리의 마음들에게 다행이자 위로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정한 날을 정해놓고 그날은 실컷 그 존재에 대해 감사하고 느끼기로 하는 것이, 매일매일 그 소중함과 무게를 감당해내는 것보다 편할 테니까. 

나는 사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정말 저승이 있는지 귀신이 되는지 또는 자연으로 돌아가는건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인지 그 무엇이 되든간에. 내가 죽은 후에 나를 생각하며 슬퍼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조금 걱정될 뿐이지 내 존재가 사라지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딱히 두렵지 않다. 진짜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결국 누구도 모르는 거라고 생각해서 그 불확실성에 대해 고민하기보단 확실한 현재, 지금 살아있는 동안 충분히 행복하고 가치있게 보내는 데에 더 에너지를 쏟자고 생각할 뿐.

이 영화 '코코'에서 사후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 애니메이션인만큼 그럴듯한 사후세계로 그려놓아서 그렇지 결국 현실의 연장과 다를바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에서는 심지어 살아있어도, 그누구도 그 존재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고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거의 죽은거나 다름 없는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 세상은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주고받고, 누군가 내 존재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길가에 서있는 나무보다도 관심을 받지 못한다면. 매일 밥을 먹고 숨을 쉬고 땅을 밟고 있다고 하더라고, 내 존재를 단 한 명도 눈여겨봐주지 않는다면, 나는 내 존재를 뭐라고 정의해낼 수 있을까. 그 존재가 가치가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가치가 있으니까. 다만 객관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 존재가 '존재감'이 있기란 혼자만의 힘으로 어렵다. 내 이름 세글자를 이 세상에서 가장 적게 불러보게 되는 존재가 사실 나 자신이듯이, 내 존재는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불려지고 기억됨으로써 한 조각 한 조각씩 만들어져가고 있으니까.

'넌 어떤 사람이야?' 라는 질문을 받을 때 아무리 스스로 자신의 내면에서만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하더라고, 분명히 그 대답안에는 어느날 어떤 누군가가 나에 대해 표현했던 한 문장 정도는 끼어있을 것이다. 

내 존재와 그 존재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의 힘

가족이란 건 분명히 큰 힘인데, 사실 그게 굳이 피가 섞인 가족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 존재를, 진짜 내 가치를 알아봐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면에서 가족보다도 더 날 잘 아는 타인이라면 그 타인이 더 큰 힘이 될 수도 있는거고.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그 가치를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한다. 실제 살아가며 내 존재와 거기서 그려지는 이미지라는 것도, 타인들의 여러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 시선들이 때론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의 시선을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기도 하고 타인의 눈에 따르면 또 그런 사람이기도 한 것이니까.

 

가장 잔인한, 무관심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존재가 잊혀지는 일 아닐까.  '인간에 대한 가장 나쁜 죄는 인간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도 있듯이, 차라리 미워하는 감정이란 건 무관심보다는 더 애정에 가까운 감정일 것이다. 최소한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점이 있기에 미워도 하는 것일텐데 무관심이란 그런 어떤 기대조차도 없이 존재 자체에 관심이 없는 거니까.

어느날엔가 문득 거울을 보며 '우리의 표정 하나하나가 다양한 이유도 1.타인이 존재하고 2.내가 나를 보는 그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과연 이 세상에 덩그러니 나혼자 남겨져서 산다면, 혹은 그 누구도 내 표정을 볼 수가 없다면 나는 이토록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살고 있었을까? 기쁘거나 슬픈 표정과 실망한 표정이나 화나는 표정 등. 말을 배우지 못한 갓난 아기도 커다란 울음소리와 찡그리는 표정으로 배고프거나 어딘가 불편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고, 조금 더 큰 유치원생도 언어전달이 서툴 때에 표정으로 먼저 자기 감정을 어른들에게 드러내는 법을 배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심지어 실제 눈물이 안나올 때에도 우는 소리와 함께 한껏 찡그리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게 되듯이. 스스로의 생존능력이 낮아서 살아가려면 어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기, 아이 나이 때에 울거나 떼쓰는 법은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생존 본능일테고. 어른이 되어서도 타인에게 우리를 표현해내고 존재를 주장해내고 싶은 마음 역시 사실 생존 본능과 비슷한 거 아닐까. 객관적으로 우린 각각의 들숨 날숨만으로 분명 존재하고 있는 것은 맞는데, 만약 내게 나의 존재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묻는다면 '숨쉬고 있으니까 존재하죠' 라고만 말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불만족스럽다고 느끼게 된다. 정말 아무 것도 주장해낼만한 특성이 없다면 숨을 특이하게 쉬어서라도 '타인과 다르게 설명할만한 나의 무언가', 그렇게 나로서 기억될만한 무언가를 찾아내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진짜 내 존재가 되려면 그것을 알아보아주는 관심도 필요하다.

 

 영화 코코는 표면적으로는 '죽은 존재를 영원히 기억하는 사랑' 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의 사후세계 규칙을 현실로 끌어내려보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사후세계에서만이 내 존재가치를 위해 타인의 기억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니까. 살다보면 친구였다가 헤어지고, 사랑을 하다가 이별하고, 가까이 살다가 멀리 떨어져 더이상 서로 연락을 하지 않는 인간 관계는 많이 발생한다. 그렇다해도 그건 시공간적으로 멀어진 존재이자 감정적으로까지 멀어진 존재라고 할지언정 '서로에게 없었던 존재'는 아니다. 시간이 흘러 잊은듯해도 분명 헤집어보면, 내 과거의 한 켠 어딘가에 상대방이 있고 그 상대방의 과거 한 켠 어딘가 아주 구석탱이에라도 내가 있다는 것이 서로에 대한 기억의 존재다. 반면 '잊는다'는 것은 정말 어느 때에도 없었던 존재처럼 여기게 되는 일이다.

 '처음부터 없던 듯이 여겨지는 것'과 '있었다가 없는 듯이 여겨지는 것'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완전히 잊혀진 것이고 후자는 잊혀져가는 중일지라도 분명 존재했다고(있었다고) 아직 여겨지는 것이다. '잊혀져가는 중'인 것과 '완전히 잊혀진 것'의 그 차이는 코코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저승세계 존재들은 이승에서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만큼 점차 시름시름 앓아가긴 해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승에서 '완전히 잊혀지는 순간' 정말 저승에서 남아있던 그 해골몸조차 깨끗하게 소멸해버린다. 헥터의 노래 듣는 걸 좋아하던 해골 아저씨도 달랑 기타만 남기고 사라지게 된다. 완전히 잊혀졌다.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듯이, 의미론적으로 접근해서 따져보자면 '잊혀진 상태'의 가장 적나라한 반대는 '온전히 기억되는 상태'가 아니라 '완전히 잊혀지기 직전까지의 잊혀지는 중' 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