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한창 추천이 올라오던 때에 일부러 나중에 꼭 봐야지 하고 모든 후기를 읽지 않고 있다가 드디어 보게 되었다.
왜 제목이 벌새일까부터 궁금했었던 영화. 이번에 찾아본 바로, 벌새는 정말 작은 것은 몸이 5cm 밖에 안될 정도로 새들 중에서 가장 작은 새라고 한다. 벌처럼 붕붕 소리를 내고 꿀을 채집해서 벌새라고 부르는데 작은 몸집으로 붕붕 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의 날갯짓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정지 비행때마다 수백번 수천번의 날갯짓을 하기 때문일 것이고, 실제 벌새의 비행 능력은 상상을 초월해서 여전히 과학계에서 완벽하게 이해해낼 수 없다고 한다. 1초에 90번까지의 날갯짓을 할 수 있고, 극한 환경에서도 추락하는 법이 없이 균형과 정확한 자세를 유지해낸다고.
"벌새의 비행 능력은 마치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안에서 사람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반듯하게 글을 쓰는 것과 같다"며 "인간은 절대 불가능한데 벌새는 가능하다"는 라비 박사팀 이야기도 있다는. 또한 보기와 다르게 그 작은 몸집으로 주로 혼자 생활하며 용감하고 겁이 없다고 한다.
이런 벌새에 대한 설명만 보고도 이 영화 속에 담겨있을 은희의, 결국 우리들이자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대되었다. 시대배경은 1994년으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영화에 등장하는데, 이 무너진 성수대교를 바라보는 은희와 친구들 모습을 포스터 중 하나로도 만들어낸 것을 보면 그 '붕괴' 자체를 은유적인 의미로도 쓰면서 뚜렷하게 시각화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은희가 인생을 겪어가고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겪는 '무너짐'들, 그리고 실제 그 시대 충격적이었던 커다란 성수대교의 무너짐. 사실 1994년에 난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어린 나이라 그 때의 사건사고들에 대해 잘 기억하지 못한다. 세상을 모를 나이였으니까. 하지만 이 영화가 1994년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 그 당시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해하는데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1994년 이후로도 이 세상에는, 그리고 우리 각각의 인생들에는 영화 속 은희가 겪어내는 인생의 단면들이 반복되고 있으니까.
주인공인 은희는 14살, 내가 한창 사춘기를 겪었던 나이와 동일하다. 중학생이 되면서 왠지 초등학교 때보다는 좀 더 큰 것 같아 우쭐대어보게 되는 나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가도 어느날엔가 빨리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나이. 그리고 또래들보다는 어른들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세상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이해해내고 싶었던 나이. 무엇보다도 내 존재 가치를, 먼저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게 인생의 큰 의미였던 나이.
겉으로 보면 이름처럼 평범해보이는 은희의 인생에는 마냥 행복해보이지 않는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남자친구와 후배들이 있다. 또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아버지와 오빠는 폭력적인 성향이 있고, 흔한 학생들처럼 좋은 대학 진학과 공부, 모범생을 강요받으면서 뒤에서 담배를 피기도 하고. 또 친한 친구와 남들에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지다가도 사소한 일 하나로 큰 배신감에 남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은희에게 잠시 귀밑 혹을 절제하는 수술을 위해 입원하는 병원 생활은 집보다 더 편하기도 하다.(조금 슬프지만) 병원에 있는 동안 은희는 환자이고, 가족들과 친구들이 찾아와 걱정해주며, 또 병실 사람들이 걱정해주고 어린 것이 고생이라며 예뻐해주니까. 그리고 이 영화에서 그런 은희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요한 인물이 있다. 병원에 있으면 담배를 피울 때와 비슷하게 편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은희에게 한문을 가르쳐주는 학원의 영지선생님. 내 사춘기 시절에서도 '왠지 나를 이해해줄 것 같고 어른 같았던 선생님'이 너무나도 큰 역할을 했었고 지금도 시나리오로 친다면 주인공에 넣을 수 있을만큼의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은희희 인생에도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그 중 몇이나 되겠는가?
은희에게 영지선생님이 칠판에 적으며 가르쳐주는 문장이다.
이쯤부터 은희가 영지선생님과 서로 시선을 주고 받고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도 첫 만남 때 영지선생님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서부터 동질감은 느꼈겠지만. 내가 중학생 때에도 창밖 먼 하늘을 응시하며 쓸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뭔가 복잡한 내 마음을 다 이해해줄 것만 같은 어른일 거라고 기대하게 됐었던 기억이 난다.
은희는 오빠가 자신을 때리는 일, 또 친구와 싸운 일 등을 말하게 되고 영지선생님은 따뜻한 차와 함께 이야기를 들어주며 마음을 나눈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는 대사 중 하나는 이 부분일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때.
은희가 선생님에게 '자신이 싫을 때가 있느냐'고 질문하자 자기가 싫을 때가 정말 많다고, 좋은 대학을 다녀도 그렇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하는 영지. '자기를 좋아하게 되기까진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싫어질 땐 가만히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한다고. 아 내가 이런 것 때문에 싫구나.
그리고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본다고 한다. 가만히 손가락을 보며 한 손가락씩 움직여볼 때, 문득 신기하게 느껴진다고.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이렇게 손가락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어서.
저 장면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내게도 꼭 힘들고 우울할 때만은 아니지만 한번씩 '살아있음을 신기해하고 싶어질 때 하는 버릇'이 있다. 우리가 동맥혈채혈을 해야할 때 주로 찌르는 부위가 있는데 엄지손가락 측의 손목에 맥박이 잘 뛰는 부위, 만져지는 부위가 있다. 그 위에 검지, 중지손가락을 갖다대면 내 심장이 뛰는 것과 같은 맥박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이상하게도 인턴 때부터 그위에 손가락을 갖다대고 내 심장이 뛴다는 걸 느끼고 있으면 따뜻한 차 한입을 넘긴마냥 마음이 평안해지곤 한다.
은희에게 영지는 얼굴을 아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자기 마음을 알아줄 것 같은 몇 안되는 선생님이다. 그래서 영지가 사라졌을 때, 결국 이 인생에서 잃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상실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특히나 중학생 때에는 또래친구와 선생님 같은 학교에서 나누는 관계 속 동질감과 우정이, 남자친구와 나누는 애정의 깊이보다도 더 깊고 의미있을 수가 있다. 물론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지만.
사실 은희에겐 엄청나게 어른인 영지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면 그저 사회초년생이자 아직 인생에 서툰 어른일 뿐이다. 갑자기 한문학원을 그만두기도 하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영지보다 더 어른인 사람으로부터 '좀 이상하잖아' 라는 말을 듣는다. 내가 30대가 되어 내 중학교 때의 선생님 나이쯤 되었을 때 '그때 엄청난 어른인 것 같았던 선생님이 이렇게 어린 나이였던거구나' 놀랐던 기억이 난다. 사실 40대, 50대도 마찬가지다. 남들보다 더 살았고 과거가 좀더 많을뿐, 모두가 그 나이는 처음 겪고 있는 인생의 초보자들이다. 엄마도 이 나이를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듯이.
# (슬프지만) 세상은 참 신기하고도 아름답다
내가 은희의 나이쯤이던 때, 내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늘 상반되는 두 가지를 함께 말하게 되었고 그게 내 무지라고 믿었다. 기쁘면서도 슬프고, 행복하면서도 불행하고, 좋으면서도 겁나고. 이렇게 표현하게 되는 것들이 둘 중 진짜가 뭔지를 내가 몰라서 그런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른이 되어보니 그게 모두가 진짜였다. 인생이란 건 그 중의 하나가 정답인게 아니라 늘 상반되는 두 가지가 공존하며 같이 오는 것.
항상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내가 '인생이 슬픈 것'이라고 말하면 주변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지지만, 사실 내게 삶이란 근본적으로 슬픈 것이다. 인생이란 불가피한 '상실의 연속'이니까. 학교 하나하나 졸업하고 인생 새로운 길로 발을 내딛을 때마다 크고작게 지인들과 이별을 겪게 되며, 그보다도 큰 인생의 흐름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 누구도 인생에서 예상치못한 사건사고와 또 시간에 따른 노화를 막아낼 수는 없으니까. 나이가 들수록 장례식에 갈 일이 많아지는 개개인의 관계에서부터, 전국적으로 커다란 상실과 비극, 영화처럼 성수대교가 무너졌었고 또 최근 세월호사건이 있었듯 예고없이 찾아오는 비극들 앞에 우리는 모두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무력한 존재들이다.
은희는 영지가 죽고 나서 엄마에게 죽은 외삼촌이 그립냐고 묻는다. 그때 엄마는 조금 뜸을 들이고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이상해." 뭐가? "너네 외삼촌이 이제 없다는 게"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은희엄마가 말하는 "그냥... 이상해"라는 느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별할 때에야 충격을 받고 많이 울고 보내지만, 그러고부터 몇 년이 지나고 인생을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죽음은 인생의 앞 어느 한페이지로 고이 넘겨 지나가는 듯 싶은데 어느날 문득 돌아보면 그 존재가 없는 것이다.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던, 나와 같은 땅을 밟고 숨을 쉬고 있던. 그 사람의 얼굴은 마지막 사진에서 더 늙지 않고 멈춰있는 것.
인생은 그렇게 상실의 연속이지만, 그런만큼 살아가고 있는 이유 또한 명백하다. 내가 인생에서 슬픔을 느끼고 상실감을 느끼는 그 단면들 하나하나가 내가 사랑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현재 살아있다는 사실에 애정이 없고 또 내 주변 사람들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인생이 그리 슬플 이유도 없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많기에 그 하나하나를 상실하게 될 때 슬프다고 느끼는 것이니까. 결국 삶이란 건 슬픈데도 어쩔 수 없이 이어져나가는게 아니라, 내가 삶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기에 슬프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슬픔들은 삶 속에서 내가 가진 애정의 결과물들일 뿐이지, 삶에 회의를 느낄 이유 자체가 되지 못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만화 '20세기소년'에 나오는 좋아하는 구절이 떠올랐다.
"강하다는 것은 약함을 아는 것
약하다는 것은 겁을 내는 것
겁을 내는 것은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
영화 끝나갈 때 나레이션으로 나오는 영지의 편지 내용이 너무 좋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도 아름답다
그리고 감독님의 '벌새' 10만 관객 달성 자필 감사 편지, '세상의 모든 은희들에게'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이라는 그 말이 모두의 마음 속에 숨어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살아가며 얼굴을 알게된 수~~많은 사람들 중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당시 10만명이었다는 관객들은 각자 너무나도 다른 인생을 살아내고 있었겠지만, 영화 속 은희와 영지를 보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동질감을 공유하고 위로받았을 것이다. 분명 표면적으로는 서로 너무 다른 인생들 같지만, 그 인생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비슷한 감정들을 겪어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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