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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정원 - 찾아낸다면 들여다보이는 안식처

유리정원, 찾아낸다면 들여다보이는 안식처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죠' 라는 구절과 함께 문근영배우의 눈빛에 사로잡히게 되는 포스터.  

       

 유리정원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궁금했다. 사실 제목에서 내가 처음 떠올린 건, 루시드폴의 '유리정원'이라는 곡이다. 내 인생 첫 힐링앨범으로 손꼽는 '레 미제라블'이라는 앨범에 수록되어 있고, 내가 고질적으로 벗어날 수 없어온 외로움이란 정서 측면에서 공감과 위로를 많이 받았던 곡. 영화감독님께선 이 곡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만드신 영화일지 몰라도 난 이 곡이 먼저 떠올라서, 영화에 깔린 정서기반이 외로움 아닐까 먼저 예상을 하며 보았다.

 

# '유리정원' 에서 느껴지는 양가적 욕구

 깊은 숲속에 자리잡은 유리정원. 알고 찾아가야만 발견할 수 있는 장소에 있으면서도, 창이 유리로 되어있어 안이 들여다보인다. 여기는 재연(문근영)이 세상에서 상처를 입은 후 들어와 고립되고자 하는 공간이자 연구를 이어가는 공간이다.

 내가 '유리'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두 가지다. 일단 깨지기 쉬운 연약한 느낌.

 그리고 두 번째가 양가적 욕구에 대한 것인데, 이 영화에서 더 많이 생각한 부분이다. 유리는 벽이든 창문이든 구성해낼 때, 밖과 구분지어진 내부공간을 만들어주는 동시에 다 비치게하는 특성이 있다. '유리'정원이라는 소재에는, 재연 본인이 자각하고 있든 있지않든 '숨겨지고 싶은' 동시에 '보여지고도' 싶은 양가감정이 들어가있다고 생각한다. 상처를 준 세상으로부터 도망쳐왔지만 완.전.히. 고립되고 싶진 않은 것이다. 내가 영화속에서 본 재연은 세상에 섞일 수 없는 것이지, 스스로 섞이고 싶어하지 않는 존재는 아니다. 나무라는 '자연'과 '인간' 둘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존재다. 완전히 나무로도 그렇다고 평범한 인간으로도 대해지지 못하는. 결국 외로움과 상처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길을 택하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누군가 찾아주고 자신을 들여다 보아주었으면 하는 욕구가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걸 상징하는 게 유리정원이라고 생각한다. '유리정원'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를 이렇게 두지 말아요
텅 빈 심장은 얼어붙을 것 같은데
손을 내밀면 문을 열어줘요
세상에 섞일 수 있게

  내가 루시드폴의 '유리정원' 을 먼저 떠올렸던만큼 이 가사에 이입되어 보게 된 영향도 있겠지만, 영화속에서 재연이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자라며 늘 느껴왔을 '외로움'에서도 통하는 부분이었다.

 영화 속 재연의 모습 중에 가장 마음이 아렸던 장면은, 하이힐을 신어보는 부분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하이힐을 신는 장면이 두 번 있었는데 처음은 자신의 업적과 남자까지 빼앗아간 수희(박지수)의 하이힐을 신고 걸어보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정교수(서태화)와 지훈(김태훈)과 춤추는 장면에서였다. 하이힐은, 열 두살때부터 한쪽 다리 성장이 멈춰서 절뚝거리며 걸어야하는 재연에겐 현실화될 수 없는 신발이다. 그렇기에 배신당한 후 수희의 하이힐을 신고 절뚝거리며 걸어보는 장면은 수희처럼 평범하게 세상에 섞일 수 없는 재연의 슬픔을 극대화하기도 하고, 이후에 하이힐을 신고 춤추는 장면은 재연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지훈의 상상 속 모습이기도 했다.

 영화 끝부분에서, 차라리 자신이 정말 나무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믿고 싶다고, 죽어서 나무가 될 거라고 믿으려는 재연의 모습에서도 극복될 수 없는 외로움이 느껴졌다. 결국 자신이 인간들의 세상이 아니라 나무라는 자연에 속해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 자신이 인간이면서 인간의 세상속에 섞일 수 없다는 건 더 괴로운 일이니까.


# '자연'과 '인간'의 연결고리, 죄책감

 내가 의미있게 생각했던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이 판타지스럽기도 한 스토리의 시작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자연과 인간의 연결지점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또는 가지지 않거나 가지고도 외면할 수 있는 '죄책감' 이라고 생각했다. 재연의 아버지가 나무에 영혼이 있다고 믿고 가지게 되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연과 인간의 연결고리 같은 재연이라는 존재가 시작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 영화는 지훈의 소설이 인용되어 재연이 정말 나무에서 태어난듯, 또 죽어서 나무가 되는듯 판타지스럽게 그려지지만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재연은 그저 장애를 가졌고 물적이익과는 먼 연구를 하다가 소외되는 인간이다. 재연은 나무가 아닌 인간에게서 태어났다. 다만 벌목꾼이었던 재연의 아버지는, 재연이 태어날 때 재연의 어머니가 죽었고 자신이 큰 나무에 도끼를 찍어대고 있었다는 동시성에서 죄책감을 느끼며 나무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재연의 한쪽 다리가 12살때부터 자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나무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죄책감은 갑자기 생겼다기보단, 아마도 벌목일을 하며 나무를 찍어댈 때 늘 한구석에 있던 게 튀어오른 결과였을 것이다. 인간에게 죄책감은 양심에 따라 흔히 따라오지만, 결과는 그 죄책감을 외면하며 살아가느냐 아니면 그걸 동기삼아 변하려하느냐 하는 인간의 선택에 달린다.

 만약 재연의 아버지가 본인이 자연에 가져온 죄책감을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재연은 그냥 불행히도 태어날 때 엄마가 죽었고 장애까지 가지게 된 아이로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연의 아버지는 나무에 영혼이 있다고 믿으며 나무들을 돌보고, 재연도 자연에 가까운 존재로 성장한다. 재연이 녹혈구를 이용한 연구에 매진하는 것도 자연의 힘을 믿는 순수한 마음에서 지속되는 일일 것이다. 돈이 안된단 이유로 무시당하고 후배가 자신의 업적을 뺏아가며 사랑하는 남자마저 자신을 외면해도, 재연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 나무가 가진 재생의 힘을 인간에게도 쓸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하고, 죽어서 나무가 되리라 믿는다. 나무와 인간을 잇는 인공혈액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런 연결고리에 대한 증명이 재연에게는 자기 존재로서의 위안을 얻는 길 아니었을까.

 이 영화의 엔딩은 분명 재연에 대한 위로였다. 재연은 죽어서 나무가 된듯한 모습과 함께 '비로소 불릴 이름을 가지게 됐다'는 말로 끝나는 반면, 세속적 욕망에 끌려 재연의 삶을 이용해버렸던 지훈은 나무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고 결국 왼쪽 몸은 마비되어 나무처럼 굳어버린 모습이다. 뒤늦게 지훈이 재연을 찾아가 사과할 때 재연은 이미 늦었다고 말하며 떠난다. 함께 병원에 가자며 잡는 지훈의 손이 참 따뜻하다는 말과 함께. 재연은 끝내 세상에 섞이지 못했지만 분명 그 마지막 지훈의 죄책감에서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늦었다'는 재연의 말엔 이미 망가뜨린 후엔 돌이킬 수 없다는 메시지도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재연은 이미 지훈의 소설 때문에 악마같은 존재로 세상에 알려지며 숨어살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는데, 병원에서 치료는 어떻게 받고 더이상 어떻게 살아남는단 말인가. 지훈의 손을 거두고 숲속으로 들어가는 재연은 힘들게 절뚝거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영화의 끝에 가장 괴롭게 남겨진 존재는, 굳어버린 자신의 한쪽 몸도 마음도 더이상 돌이킬 방법이 없는 지훈이었다.


# 나무의 가지 vs. 지훈의 팔

 지훈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풀자면, 영화포스터엔 없지만 영화속에서 재연과 함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다른 사람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나 궁금해서 후기들을 좀 읽어봤는데, 지훈이라는 캐릭터설정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지훈은 자신의 소설 재료로 쓰기 위해 몰래 재연의 삶을 훔쳐보고 사진을 찍으며 스토킹을 하는데, 그런 점이 영화속에서 미화되어있지 않냐는 점이었다. 엄연히 범죄이고 처벌받아야 마땅한 행동인데 그런 문제점에 대해서는 별 문제되지 않는듯이 스토리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몰래 집에 들어와 재연의 다이어리까지 훔쳐가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 재연은, 어떻게 된거냐고 따지긴 하지만 그 소설을 계속 써서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해달라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감독님의 인터뷰를 보니,(http://magazine2.movie.daum.net/movie/46455)


관객 입장에서는 의외의 주인공 ‘지훈’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재연’의 삶을 훔쳐보는 방식이 범죄의 경계에 걸쳐 있는 듯한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누가 그러던데? ‘한남’이라고.(하하하)

(하하하)

누군가를 훔쳐보는 건 범죄 행위다. 현실에서 그런 행동을 벌이는 남자라면 ‘한남’ 맞다. 하지만 영화 안에선 그런 걸 모두 ‘쌩까고’ 가고 싶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이창>(1954) 역시 누군가를 훔쳐보는 한 남자의 이야기 아닌가. 관객이 ‘지훈’의 심정에 동화되기만 한다면 그를 범죄자로 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훈’의 심정, 그러니까 ‘재연’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부각하기 위해 의도한 연출 지점이 있을 것 같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지훈’이 숲에서 (다리를 저는) ‘재연’을 따라갈 때 그의 보폭에 맞춰 걷는다. 그렇기 때문에 ‘재연’ 역시 그가 따라오게 놔두는 것이다.


라고 되어있었다. 물론 이 인터뷰 답변에 대해서도 논쟁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지훈의 심정이 이해갈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범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여지는 없으니까. 지훈이 사과할 때 자신의 행동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인지한 모습을 보여주었거나 당한 재연이 확실하게 짚어주고 넘어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훈에게 동정할만한 면이 있는건 사실이다. 여자는 떠나고 무명작가의 생활은 선배소설가의 표절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외면당하며 더욱 어려워지고, 설상가상으로 좌측 얼굴부터 팔까지 경련과 마비가 오는 증상이 선천적인 병이라 고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게 절망으로만 차있던 그의 머릿속에 재연의 삶이 들어오는 것이다. 재연을 향한 마음에 동정과 애정이 있었을지언정, 어쨌든 지훈은 수희, 정교수에 이어 재연의 삶을 이용하는 세 번째 인물이자 결정적으로 재연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인물이다. 내가 봤을 때 죽음을 맞는 정교수보다도 더 지독한 벌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고.

 영화의 뒷부분 중에 나무와 인간을 비교하는 재연의 대사가 있다. 나무는 함께 크면서 서로가 다치지 않게끔 가지를 뻗는데, 인간은 서로를 죽인다는 말. 팔과 다리는 나무에 비유했을 때 인간의 몸에서 뻗어나온 가지처럼 생각할 수 있는 부위이고 지훈의 팔은 또 소설을 쓰는 부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훈의 소설이 결정적으로 재연의 삶을 아예 세상에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온다. 재연이 말했던 나무의 가지와는 달리 지훈의 팔은 재연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지훈이 가진 병이 한쪽 팔다리가 한번씩 경련을 일으키다가 결국엔 마비가 되어 나무처럼 굳어버린다는 설정에선, 그런 면에서 연결되는 벌처럼 느껴졌다. 지훈은 자신도 한때 타인들의 세속적 욕망에 치여 상처를 받았으면서, 자기 역시 소설이 잘써지고 인기가 올라가자 욕망에 눈이 멀어 재연의 삶을 이용하게 된다. 마치 수희가 성공을 위해 재연의 아이디어를 뺏고, 정교수가 돈을 위해 재연을 외면한 것처럼.

 재연이 지훈의 소설 속 자신에 대해 '그 소설 속 주인공은 나처럼 다리를 절지도 않던데' 라고 묻자 지훈은 소설속에서라도 재연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재연은 거기에다가 '그건 너의 욕망일 뿐'이라는 말을 한다. 재연의 말처럼 지훈은 자신의 욕망을 소설로 써내려갈 뿐이다. 인간 누구나 자신의 욕망을 기반으로 움직인다, 남을 위한 거라고 믿고있는 것들조차 사실은. 어쩌면 지훈은 나무처럼 굳어가는 듯한 자신의 몸 반쪽에 대한 절망을 재연의 다리에 빗대어 보고, 재연의 다리에 문제가 없고 행복한 이야기를 그림으로서 자기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굳어버리지 않을거라는 기대와 함께. 그리고 소설속에서라도 재연을 행복하고 신비한 주인공으로 만들며 재연의 삶을 이용하는 죄책감을 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재연 역시 나중엔 자신이 그 소설의 주인공처럼 되길 바랐었다고 고백한다. 재연도 그 소설, 그 가상현실이 믿고싶었던 것이다. 만약 지훈이 자신의 삶을 소설로 쓰고있음을 알아차렸을 당시 '계속 써달라'는 말대신 말도안된다고 선긋고 더는 못하게 차단해 버렸더라면,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재연이 계속 소설을 써달라고 말하는 부분은 곱씹어볼수록 마음 아프다. 결국 재연의 마음이 기대어볼 수 있던 곳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낯선 타인이 써내려가는 소설이었던거니까.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고 자신의 연구를 외면했기에, 그의 소설을 통해서라도 진짜가 되고 싶고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받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 아니었을까. 재연 역시 독자가 되어 지훈의 소설이 진행되는대로 읽어가고, 결국 자신을 믿지 않고 미친 과학도 정도로 매도하는 소설의 결말에 또 한번 상처를 받는다.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다. 재연의 유리정원은 결국 그 '유리정원'이라는 소설로 인해 깨져버린다.


# 유용할 수 없는, 순수함에 대한 동경

 재연과 연인처럼 나오는 정교수는 결혼도 했었던 남자이고, 재연과 교수-제자 관계로 나오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의 러브라인 설정을 비판하는 시선도 있다. 나이많은 남성과 어린 여성을(특히 권력관계가 포함된) 사랑하는 사이로 그려내는 설정이 요즘 각종 드라마며 영화에 너무 많기도 하고, 많은 여성들이 그런 여자캐릭터가 그만 나왔으면 하며 분노하니까.

 정교수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재연의 실험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지만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다"는 말을 먼저 뱉는 인물이기도 하다. 포스터 글귀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죠"란 말이 어디에서 등장할까 궁금해하며 영화를 봤었는데, 의외로 그 말을 처음 내뱉는 건 재연이 아니라 정교수였다. 재연이 정교수를 숲으로 데려갔을 때, 한땐 낚시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맑았던 물이 인간들이 하류를 막은 후 썩어가고 있는 것을 보며 정교수가 하는 말이다. 나중에 재연은 정교수의 배신에 분노하며 수희와 정교수 앞에서 그 말을 그대로 인용해 버리는거고. 영화에선 재연에 대한 정교수의 마음은 사랑이 아닌 연민이었다고 나오지만, 내가 생각했을 땐 연민이라기보단 순수에 대한 동경에 가까웠다. 마치 동심을 그리워하듯 사람들은 순수함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산다. 다만 그 순수함은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에 유용하지가 않다. 정교수도 재연의 그런 순수함에 끌렸다가 그것을 지지하며 살아나갈 수 없는 현실앞에 등돌리는 것 아닌가.

 재연이 정교수의 죽은 몸에 계속 실험을 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아름답게도 추악학게도 해석가능할 것 같다. 정교수를 나무로 만들어 살리고자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연구를 지속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고, 사람들이 외면한 자신의 연구(정교수조차 외면한)를 결국 배신한 정교수의 몸을 이용해 이어간 일종의 복수심리 작용일 수도 있다고. 재연은 실제로 정교수를 휠체어에 태워 말도 걸고 마치 살아있는듯이 대하는 장면들에서 정말 살려 곁에 두고픈 마음뿐이었나 싶기도 하지만, 순수한 마음도 얼마든지 위험한 결과로 다다를 수 있다. 정교수는 실종됐고 알고보니 재연이 그의 시체를 데리고 계속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 대해 재연의 순수한 마음으로 설명한다고 해봤자 과연 어느 정도까지 미화가 되며 납득이 될 수 있을까.

 

# 세상을 벗어나야 해피엔딩이라면

 이 영화를 완전히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재연은 세상을 떠나게 되니까. 하지만 재연이라는 존재의 편을 들고 재연의 순수한 믿음을 응원하는 영화 속 시선이 많이 느껴졌다. 지훈이 쌓아준 벽돌 사이로 피어나는 싹이라던지, 재연이 인공혈액을 주입했던 새가 다시 살아나 날아가는 모습, 재연이 나무로 형상화된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결말. 재연은 끝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영화끝에 가장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지훈이었고.

 난 이 영화를 보며 '힐링되는' 느낌까지 받진 못했지만 재연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받는 위로가 분명 있었다. 누구나 결국 죽으면 재가 되어 날아가든 땅속에 묻히든 자연으로 돌아간다. 죽음이란 것 뒤에는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이 그 사람을 잃은 것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지, 이 세상을 뜬 사람은 어쩌면 자연으로 돌아가 이 세상보다 더 편안한 어딘가에서 슬프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재연이 끝내 세상에 섞이지 못한 게, 순수하면 당하고 남들과 다르면 소외되는 현실 같아서 안타깝긴 했지만 재연의 죽음이 슬프지는 않았다.  

 이 영화를 보며 좋았던 건, 내용 전개속에서 판타지가 가미된 지훈의 소설이 중간중간에 함께 읽히며 동화를 읽는듯한 느낌도 동시에 받을 수 있던 부분, 그리고 배경이 큰 나무들과 초록빛 숲이면서 그 색감으로부터 오는 정서적 휴식같은 느낌. 영화를 찍을 그 숲속 배경을 찾느라고 고생했다고 하는데, 정말 영상미는 그 노력만큼 얻어진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영화를 보는동안 재연에 많이 몰입되어 있었던건지 새삼스레 내가 얼마나 인간인지에 대해 느끼게 되기도 했다. 자연은 늘 우리 주변에 있는데, 늘 걸어다니는 거리에도 나무들이 있는데, 내 마음은 자연과 가까이에 있나. 사는 게 바쁘다보면, 의지적으로 마음먹고 자연을 보려하지 않는 이상 그것들이 늘 너무 자연스럽게 있어서 의식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자연을 힐링삼아 '찾는' 사람들도 많은 것일테고.

 

#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죠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다는 말을 가만히 생각하다보면, 아직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것들은 어떻게 살아남고 있는가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닿게 된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하얀 종이일수록 쉽게 더렵혀지듯이, 순수한 것들은 쉽게 오염될 위기에 처한다. 순수하게 존재하는 자연이 인간에게 이용당하듯이 재연의 순수한 연구는 돈벌이 목적으로 이용되고, 재연의 삶조차 지훈의 소설로 팔려나간다. 분명한 건, 우리 누구나 정도만 다를뿐 재연처럼 세상속에서 또 사람들 안에서 상처받으며 살아가게 되고 그런 때 각자 자신만의 유리정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각자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장소.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또다른 사람으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영화속에서처럼 한사람을 지나 또 다른 사람조차 상처로 돌아올 뿐일 때 우리가 믿고 돌아가게 되는 최종적인 안식처는 자연, 혹은 순수함이 남아있는 어딘가 아닐까. 나에게 그 어떤 욕망도 쏟아내지 않는 곳. 순수한 것들을 지켜나가야 하는 이유가 순수한 것들 자체를 위해서라고 말하기엔 위선적이고, 언젠가 순수한 것에 기대게 될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라는 게 더 솔직한지도. 나무에 영혼이 있다는 믿음도 그렇게 믿음으로써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의지하고픈 인간의 나약함과 욕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순수한 것들은 그저 오염되기 전까지 존재할 뿐이고, 그것들이 얼마나 이용되거나 지켜지게 될지도 결국 인간의 어떤 욕망이 더 우선시되느냐에 달린 문제. 그리고 재연과 지훈처럼 그 결과적인 삶 역시 각자 떠안아야한다.

 

 앞에서 말했듯 이 영화는 재연을 감싸주려 노력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어쨌든 재연의 삶은 참 슬프지 않았나 싶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재연들은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덜 외롭고, 더 강하고, 세상에 섞였으면 좋겠다. 만약 이 영화속에서처럼 기댈 사람들조차 다 잃었을 때 그래도 남겨져있는 마지막 공간, 유리정원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 공간이 도피처라면 남들로부터 쉽게 들키지는 않더라도, 애정을 줄 수 있는 누군가에 의해서는 들여다보일 수도 있다면. 그리고 나 역시 내게 남겨져있는 일부의 순수함이 있다면 그게 다른 누군가에게는 쉼터였으면 좋겠다.

 나는 아무리 재연이 죽어서 나무가 되고 그게 결코 재연에게 불행한 삶은 아니었으리라 믿어본다 하더라도, 여전히 좀 슬프긴 하다. 그냥 죽기전의 현실에서 모두가 최대한 행복했으면 좋겠다. 죽은 뒤에 대해서는 그 결과적인 위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천국이나 지옥이 존재하는지도 관심없고. 그저 이 세상 위에서 살아가는동안, 지금 존재하는 그대로 모두가 최대한 덜 아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