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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기/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느껴진 수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봉 전부터 이슈화되었던 홍상수감독의 영화를 보고 왔다. 영화 줄거리가 미리부터 밝혀지면서, 나오기도 전부터 김민희배우와 감독 간 불륜 문제에 대한 욕으로 댓글이 도배되는 것도 보았고,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마저 불륜에 동조하냐 비윤리적 인간이다로 강하게 몰아가는 사람들 있는 것 역시 안다. 납득도 한다.

 

 

 그래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조심스럽지만, 사실 영화를 보는 건 개인의 자유고 아마도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이런 스캔들이 나기 오래전부터 홍상수감독의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본 것이지 이들 관계에 대한 옹호나 편을 들겠다고 본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굳이 돈까지 내며.

 그래서 감독과 배우의 문제로 이 영화와 이 영화를 본 사람들까지 삿대질 할 분들이라면, 그분들의 그런 마음도 존중하므로(거기에 반대하려는 게 아니므로), 그냥 본인 스스로 감정소모할 필요 없게끔 이 글을 안읽으시면 좋겠다. 왜냐하면 난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나왔기 때문에.

 

 워낙에 본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는 말이 알려져서 영화내용으로부터 완전히 떼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딱히 그 둘의 현실을 대입하지는 않고 보려고 했다. 애초에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어떻게 불륜까지 갔는지 궁금해서 영화를 본 것도 아니고, 궁금하지도 않았고. 이 스캔들 이전부터 내가 생각해온 홍상수감독은 불륜을 미화시키는 방향으로도 충분히 영화를 만들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불륜 스토리로부터 '불륜'이 어떤지를 보려는 게 아니라 그런 관계설정이기에 더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는 인간의 감정, 욕구가 그려진 방식을 보고 싶었던 거니까.


 내가 홍상수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영화 속 인물들과 이야기들, 그리고 촬영해서 보여주는 방식이 옆집 구경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예쁘고 아름답고 미화된 세상에서 떼어낸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어딘가 있을법한 누군가의 인생을 구경하는 느낌. 그리고 대본없이 그 날 그 날 영감오는대로 찍는 방식 덕분인지 의식의 흐름대로 따라가게 된다. 그냥 인생처럼 긴장하다가 풀렸다가 하면서, 그걸 자연스럽게.


 # 밤의 해변에서, 혼자?

 

영화보기 전에 기사들을 좀 봤었는데, 제목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제목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인데 영화속에서 영희(김민희 분)가 밤 해변가에 혼자 있는 장면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 일단 이 영화는 1, 2 로 나뉘어져있는데 1의 배경은 독일 함부르크, 2의 배경은 강릉에서 시작하고 두 번 다 해변가에 가는 것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영희가 실제 혼자 있진 않았지만 사람들 속에서 혼자 있는 것이기도 했다는 식의 상징적인 해석을 하기도 한다. 난 개인적으로, 정말 영희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다만 그 장면이 (해변가에 누워 영희가 꾸고 있는) 꿈을 보여줌으로써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영희가 사랑했던 감독과 영화쪽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지는 장면이 '영희가 밤 해변가에 혼자 있는 장면'을 대신하는 꿈 장면. 승희(안재홍 분)가 누워있던 영희에게 말을 거는 것부터 꿈의 시작인 것이다. 그 씬 뒤의 장면이 영희가 해변가에 누워있다가 누군가 깨울 때 꿈을 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깨우는 그 누군가는 드러나지 않는다. 중요하지 않다.

 물론 꿈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이 장면을 영희의 꿈 속이라고 생각한 건, 꿈이라면 자기 욕망을 아무 인물이나 빌려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꿈엔 무의식이 반영되고 꿈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낯선 사람이든 지인이든간에 자기 무의식속에 있던 누군가가 그 인물들을 빌려 나타나는 것이라고들 한다. 즉, 현실과는 상관없이 이게 꿈이라면 좀 더 영희의 무의식적 욕망을 적극 반영해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분명 이 영화속에서는 영희와 감독이 해피엔딩으로 사랑을 이루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았고 스킨십조차도 없다. 하지만 꿈이라고 생각하면 감독과 영희 간의 실제스토리를 떠나 영희가 무의식적으로 자기 현실을 어떻게 그려내고 싶었는지- 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이 장면속에서 감독의 대사나 태도들도 영희가 자기 무의식을 반영시켜 그려내는 감독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영희는 감독이 칭찬했다는 말에 자신이 예쁘냐고 직접 몇 번이고 되묻고 웃음을 흘리다가도, 돌연 격앙된 말투로 쏘아붙이기도 한다. 후회하세요? 와 같은 말. 거기에 대한 감독의 대답은 정말 후회한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지긋지긋하게 후회한다고. 그런데 그렇게 괴로운 얼굴로 말하다가도 덧붙인다. 계속 후회하다보면 그게 또 좋아지더라고 죽을 때까지 이렇게 후회할까 싶어진다고. 왜 감독님은 예쁜 사람들과만 일하느냐 질투하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이 씬이 끝나갈 쯤 감독이 영희에게 책을 선물하는데, 그건 자신이 사랑했던 감독으로부터 대본을 받아 함께 영화를 하고싶은 욕망이 반영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꿈은 다양한 형태를 빌려서 꿈을 꾸는 자의 욕구를 반영시키때문에, 이 장면을 진짜 영희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속 다른 장면들은 타인들과 함께있는 현실이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 잠들어 영희가 꾸고있는 꿈 안의 타인들은 사실 다 영희로부터 나온 인물들이며, 영화제목은 이런 영희의 세계를 말하는 것 아닐까. 승희가 누워있던 영희에게 추우니 자기들 있는 곳으로 가자며 데려갈 때, 영희는 그림을 그려놨었던 막대기를 들고 따라나선다. 생각해보면 막대기는 굳이 쓸 일 없는 도구 아닌가. 막대기를 들고 따라가는 모습이, 그 장면부터는 영희가 그려내고 있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혔다. 꿈이라는 공간을 빌려서.

 

# 두통, 사랑

 

이 영화에서 취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태도는 영희가 천우(권해효 분)와 명수(정재영 분)에게 말하는 방식과, 그 둘이 나타나는 모습의 차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천우와 명수에게 영희가 하는 말은 반대다. 천우에겐 더 젊어진 것 같다고 하고, 명수에겐 몸이 상해보인다, 늙어보인다, 얼굴이 까매진 것 같다 등등 하며 건강검진은 받아봤냐는 이야기까지 한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도 명수는 위약하게 나온다. 도희가 별로 추운 날씨도 아니라는데 패딩을 입고 들어오면서도 너무 춥다고 연발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명수는 머리가 아프다. 두통. 명수가 영희에게 도희와 그냥 친구사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도희가 우리가 그냥 친구 사이냐고 갑자기 언성을 높이면서부터 여러 트집을 잡고 당장 콩 고르는 일을 하도록 다그치는 장면에서다. 이런 상황에서 명수가 머리가 아프다고 쥐어싸니까 도희는 맨날 아프다더라며 거든다. 영희는 계속 머리를 싸매고 있는 명수에게 정말 많이 아픈가보다고 걱정해준다. 이런 상황을 볼 때 명수가 호소하는 두통이 당장 콩 고르는 일을 하기 싫어서 부리는 엄살로 보일 수도 있고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덧붙이자면, 명수가 결국 콩 골라내기를 시작할 때 펼쳐놓고 콩을 고르는 그의 손과 장면을 클로즈업하는 부분이 좋았다. 사실 중요하지 않은 장면이지만 그런 식의 촬영기법이 마치 내 눈을 대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중요한건 대사고, 대사는 듣고 있으면서도 콩 고르는 일이 어떤 작업일지 궁금해져서 들여다보게 될텐데, 마치 내가 그 장면속에 있기라도 한 느낌이 들게끔, 콩 고르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눈을 대신해주는 듯한 촬영이었던) 그렇지만 뒤에서 두통은 다른 인물에게 또 등장한다. 바로 영희가 사랑했던 감독이다. 영희가 감독과 함께 일하는 승희에게 감독님 잘 지내시더냐고 물으니, 1년 정도는 머리를 많이 아파하시더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또한 준희(송선미 분), 천우, 명수, 도희와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천우는 명수가 도희와 연인 관계가 되면서부터 몸을 아파하더라는 이야기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반면 앞에서 말했듯이 천우는 전보다 더 젊어보인다고 영희가 이야기한다. 이 영화에서 천우와 명수의 차이점은, 명수는 도희(박예주 분)와 연인관계에 있으며 천우는 혼자인 점. 두통이며 몸이 여기저기 아픈 증상은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인 남자에게 있다. 이렇게 영화에서 사랑의 고통을 두통으로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생각할 때 더 재미있는 장면은 이 술자리의 중간이다. 영희가 준희와 키스하고, 도희와 명수가 키스하자 천우는 옆에 있는 준희에게 자기에게도 해달라고 보챈다. 지켜만 보다가도 다시 아무래도 안되겠다며 자기에게도 해달라고 칭얼거린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명수와 같은 두통도 없고 아프지도 않지만, 결국 천우는 혼자 소외되고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이 장면을 통해 사랑을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 말하려던 게 아닐까.

 영희가 즐겁게 웃고 귀여운 모습을 보이다가도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뒤에 감독과의 술자리에서처럼) 사랑에 대해 따지는 것도 주요한 장면이다. 이 세상에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아무도 없다고. 소리치니까 도희는 꼭 자격이 있어야 사랑을 하는거냐고 그냥 하고 싶으면 하는거 아니냐고 함께 언성을 높인다. 남자들 버리고 우리끼리 사랑하자며 영희가 도희와 키스를 하는데, 나중에 밖에 나와서는 여자와 키스는 처음이라고 수줍게 말하면서도 '다신 안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장면에 ㅋㅋㅋㅋ 를 붙이고 싶다. 결국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 대신으로 잠시 충족해본 셈이었던 거니까. 준희는 '너와는 끝까지도 함께 갈 수 있겠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며 영희에게 애정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시선

이 영화 속 미스테리 인물은, 검은 옷 남자다. 엔딩 크레딧에서도 '검은 옷 남자'라고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이 인물은 함부르크였던 1에서는 산책중이던 영희, 지영(서영화 분)에게 뜬금없이 시간을 물어보는 남자로 등장하고, 2에서는 천우, 준희와 함께 온 호텔 밖에서 창문을 닦는 남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호텔에서는 모두 그를 '없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밖에서 정말 티나게(!!) 창문을 빡빡 닦고 있는데도 그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할 대화를 하고 영희는 창문을 열기도 하고 밖을 보기도 한다. 더 웃긴 건 영희가 창문을 열 때 그 남자가 도와준다는 것.

 이 남자에 대한 해석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내게는 '영희를 보는 불특정 다수의 시선'이자 '현실의 시선'을 상징하는 인물처럼 보였다.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고 온통 검게만 입어서 '어떤 한 명' 이란 느낌보다는 '사람들'을 상징할 수 있을 것 같다. 함부르크는 영희가 감독과의 스캔들 후 일종의 도피처처럼 가있던 곳이다. 거기에서 지금 몇 시인 줄 아느냐고 우리말로 시간을 묻는 사람의 등장은, '지금 현재'를 아는지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외로의 여행은 원래 있던 곳과 시간도 다르며 낯선 환경 속에서 현실을 잊게끔 해주는 일탈의 즐거움이 있다. 그렇게 도피중이었던 영희에게 지금 시간을, 현실을 자각하도록 하는 존재인 것이다. 아마도 영희에게 불편했을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이 또 등장하는데 그 땐 다가오고 있는 걸 발견하자마자 저 사람 또 온다며 빨리 자리를 뜨자고 피해버린다. 그 사람이 1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건 해변가다. 뜬금없이도 이 남자에게 영희가 마치 납치를 당하는듯한 형상으로 들쳐매어져 사라지는 장면이 1의 마지막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2에서 영희는 한국으로 돌아와있다. 이것은 결국 현실로 돌아가는 영희를 보여주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2에서 이 남자는 영희가 있는 호텔 안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창문을 닦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 남자의 존재가,독일에 있을 땐 영희를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이었다면 한국으로 돌아온 영희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그녀에게 쏟아지는 대중의 시선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도 '너 이야기 다 들었다' 고 이야기하고, 그녀가 스캔들의 중심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영희가 있는 공간 밖에서 창문을 열심히 닦는다는 것이 그녀를 향한 대중의 시선이고, 그것이 안보이는듯 행동하는 영희와 지인들의 모습 또한 그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모습인 것처럼 느껴졌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희는 말과 행동이 계속 반대다. 불륜이라는 관계 속에서 느꼈을 복잡한 감정이나 갈등을 대신하는 것 같다. 영희는 독일에 있을 때 '자기가 오고 싶으면 오는거지 난 안기다릴거야' 라고 말하면서도, 해변가에선 그의 얼굴을 그리며 보고싶다고 말하고. 한국에 와서도 남자들에 대해 욕하고 사랑엔 누구도 자격없다고 말하면서도 또 해변가에서 그의 얼굴을 그린다. 그렇게 그림을 그린 막대기를 꽂아놓고 해변가를 보며 옆으로 누워있는다. 누군가 다가와서 그렇게 오래 누워있어 걱정했다며 괜찮냐고 묻기 전까지, 그녀가 '밤'을 꼬박 넘기고 다시 밝아올 때까지 혼자 추운 해변가에서 꿈을 꾼거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다만 그녀가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기 때문에 그녀에겐 그렇게 꿈을 꾸는 동안이 밤이었을수도 있다.

 

결국 이 영화를 보며 남은 언어들을 조합해보면 이런 것 같다. 사랑해서 '두통'이 오고 '아파'보이고 '지긋지긋하게 후회'도 하지만 혼자인 천우는 '나한테도 해줘'라고 뽀뽀를 갈구하고 감독과 헤어진 영희가 꿈속에서 재회하며 책을 선물받듯, 사랑을 찾아가게되는 욕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 영희가 하는 말들, "나답게 살고 싶다" "솔직해야 한다" 그리고 지영에 비교해 자긴 욕구가 많다고 이야기하는 모습들에서, 영희는 천우가 말하듯 더 성숙해진 사람처럼 보인다. 또한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자주 "배고프다"는 말을 한다. 욕구가 덜한 지영은 영희보다 더 조금 먹고도, 배고프지 않냐는 영희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하며,  오히려 파스타 한 그릇을 더 먹는 건 영희다. 영희가 계속해서 사랑의 허기를 느끼며 채우고 싶어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부분. 그러니까 결국엔 불륜이고 뭐고,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닐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독일에서 영희가 담배를 피우며 혼자 노래를 부르는 장면. 노래가사는 이렇다.

 

바람 불어와 어두울 땐

당신 모습이 그리울 땐

바람 불어와 외로울 땐

아름다운 당신 생각

잘 사시는지 잘 살고 있는지

보이시나요 저의 마음이

왜 이런 맘으로 살게 됐는지

보이시나요 저의 마음이

왜 이런 맘으로 살게 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