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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기/영화

아가씨 - 마음을 빼앗은 '진짜' 가짜

마음을 빼앗은 '진짜' 가짜, 아가씨

 

 

 개봉 전부터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박찬욱감독의 영화 '아가씨'

 나는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게 몰입해서, 재미있게 보고 나왔다. 복수 시리즈부터 박찬욱감독을 좋아해왔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기도 했고, 밑도끝도 없이 변태적이기만 하다고 몰아가는 사람들의 많은 이유로 생각되는 동성애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아 물론 코우즈키는 정말 변태적인 성향을 가진 남자였지만. 무엇보다 네 명의 주인공 모두 내가 너무 좋아하는 배우.(김태리양은 이번부터)

 

      

 

 사실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사기꾼 기질이라는 것은 익히 들었기 때문에 반전을 모르고 보려면 영화내용을 안찾아보는게 좋았을 것인데,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놓치는 포인트들 없이 다 보고 싶어서 많이 찾아보고 갔다. 박찬욱감독의 영화에 대한 인터뷰라던지 이미 본 사람들의 후기같은 것들을. 다행이었던 것은, 여러 글을 읽어보고 갔는데도 영화를 볼 때에서야 반전을 알게 되어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일일이 설명해놓지 않은 사람들의 배려인가)

 미리 찾아보고 간 영화에 대한 내용은 이런 것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박찬욱감독이 영화에 대해 한 인터뷰들.

 "내 영화치고 대사가 많은 편이다. 그 중 일본어 대사가 많은 건 대사를 자막으로 보면 관객들은 그 순간 영화를 문학처럼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그 전 작품도 불친절하고 어렵다고 생각은 안했는데 내 영화는 그럴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긴 있더라. 그래서 한 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하고 고민이 되기도 한다. 이 영화는 그런 기준을 따졌을 때 굉장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설명을 많이 해주는 영화다. 그러다보니 영화 시간이 길어졌다. 길어진 대신 관객들은 따라가기 쉬운 플롯이라고 생각한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글도 미리 읽어보았었다. 그래서 3부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나 인상깊다는 몇몇 장면들도 미리 알고갔다. 정말로 박찬욱감독님이 신경을 써서 만들어서인지, 보면서 가장 따라가기 쉬운 영화였던 것 같다.

 영화 박쥐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신발이라는 소재가 등장한다. 히데코가 다른 동료들에게 신발을 빼앗긴 숙희에게 신발을 선물하는데, 숙희와 히데코가 하녀-아가씨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라는 것을 짧게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내가 재미있게 보았던 이유는 같은 상황을 다른 시선으로 보여주는 구성 안에 숨겨져있던 유머나 암시를 찾아내는 재미였던 것 같다. 앞에서 보여주었던 장면이 뒤에서 똑같이 다시 나올 때, 진짜 퍼즐을 맞춰보라며 대사나 장면을 하나씩 더 던져주는 그런 느낌. 

 예를 들면 앞부분에서 히데코가 나무(이모가 목매달았던)에 두 팔로 매달리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에 볼 땐 이모에 대해 애도하는 행동 같기도 하고 집에 갇혀 딱히 할 일이 없는 아가씨 히데코의 무료함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장면 자체가 마냥 예뻐보였었다. 그런데 같은 장면이 뒤에 다시 나올 땐 그녀가 자기 목을 매달아 늘어뜨리기 위해 목에 밧줄을 두른 채 그렇게 익숙하게 두 팔로 매달린다. 그 뒤의 장면 반복으로 인해 한가로운 아가씨정도로만 보았던 앞 장면이 마치 자살 연습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바뀌어서 다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결혼을 할 때 히데코가 백작에게 반지 대신 받는 약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약의 정체를 보여주지 않고 그것이 무엇일지 궁금하게 살짝 비춰주기만 한 후, 뒤에서 그 약의 의미를 보여준다. 그 약은 지하실에 끌려갈 것을 두려워하는 히데코에게, 혹시라도 코우즈키가 찾아내게 되면 잡혀가지 말고 차라리 죽으라며 백작이 자신의 사기를 완성시키려 주는 것이다. 반전적으로 뒤에 그 약을 히데코가 결국 자신의 사기를 완성시키기 위해 그걸 준 백작에게 써먹는 플롯도 한 재미 톡톡하게 한다.

 숙희가 히데코를 속이는 것까지만 알고 볼 때 히데코가 했던 말들도, 히데코가 사기꾼 백작(하정우)과 함께 숙희를 속이고 있는 게 드러난 후 반복될 때 더 재미있어진다. 가짜에게 마음을 뺏기다니 불쌍하다며 순진한 히데코를 동정까지 하던 숙희가 실제로는 얼마나 더욱 순진했는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재미에 펀치 하나를 더해서,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결국 속고 있는 것은 숙희와 아가씨가 서로 속이게 만들려고 모든 걸 짜던 백작 자신이고.

 

 진짜 일본인이 되고 싶어 처와 이름까지 버린 코우즈키(조진웅)와 엄청난 사기꾼같아 보여도 실제론 귀여운 구석이 많은 캐릭터 백작 하정우, 사사키부인 역에 김해숙씨와 이모역으로 조연을 했던 문소리씨까지 연기는 인상깊었지만, 아무래도 이 영화에서 주목해서 보게 되는 것은 히데코와 숙희, 아가씨와 하녀 둘의 관계였다.

 네 명의 주인공 중 영화에서 맨 처음으로 보여지는 인물이 숙희다. 그것도, 아기들을 돌보는 엄마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과 도둑질을 하던 엄마의 속성을 물려받아 뛰어난 소매치기이자 사기 기질을 가진 모습으로. 앞부분에서 그녀가 자신도 젖만 나온다면 이 아기들을 다 물려주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이, 뒤에서 히데코와 사랑을 나눌 때 반복되면서 그 땐 히데코에 대한 모성과 비슷한 애정으로 비춰지는 대사가 된다. 히데코 또한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낳을 때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하며 숙희에게 위로받을 때 '이런 게 동무라는 것인가' 하는 애정을 느끼는 것을 보인다. 나중에 히데코가 자신이 수없이 읽으며 수모를 당해야했던 책들을 숙희에게 보여주었을 때 숙희가 터지는 분노로 책들을 다 찢고 파괴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그 때만큼은 숙희가 히데코의 하녀가 아니라 엄마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히데코는 그렇게 다 찢고 무너뜨리는 숙희를 한동안 계속 바라보기만 하다가 나중엔 같이 동참한다. 그 쯤이 히데코가 숙희에게 절대 자신을 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엄마와 같은 사랑을 느끼며 힘을 얻게 되는 지점인 것 같다.

 사실 히데코는 애초에 숙희가 생각했던대로 순진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는 아니었지만, 사사키부인과 하녀들에게 때론 잔인하면서도 코우즈키 앞에서만큼은 겉으로나 속으로나 무력해왔다. 백작이 사기를 공모해서 함께 달아나자고 할 때도 가장 걱정하는 것이 코우즈키가 찾아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없이 코우즈키 아래에서, 거대한 주택 안에 갇혀서 성장해온 히데코에게는 코우즈키의 존재 자체가 너무 싫으면서도 벗어나는 걸 감히 상상해볼 수도 없는 하나의 세계였을 것이다. 사실 그런 경우, 동화 속에서 악마의 성 안에 갇힌 공주처럼 자신을 구하러 올 백마 탄 왕자님을 꿈꿀 법도 한데, 굳이 '당신이 싫어요' 라고 백작을 밀어내는 것에는 그가 사기꾼이며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코우즈키로 인해 남자에 대해 가지게 된 분노가 이미 깔려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만큼 늘 그리웠을 엄마라는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숙희에게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나아가기가 더 자연스럽고 쉽지 않았을까.

 이 영화 제목이 영어로는 The Handmaiden 인데, 정말 맞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주인공을 숙희라고 생각해보아도 어색함이 없다. 코우즈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고 평생을 갇혀지내던 집에서 벗어나는 히데코도 정말 해피엔딩이지만 배운 거라곤 도둑질과 아기 보는 것밖에 없던 천한 숙희가 히데코를 속이려던 원래 목적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더 상급인 백작마저 속이며 히데코의 그 해피엔딩을 함께 맞는다는 것이야말로 제대로된 인생 역전극 아닌가. 그녀 둘은 마지막에 사랑을 나누면서까지 한때 그녀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방울을 이용하며 그 두 남자를 제대로 조롱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두 남자를 속이고 파멸로 이끌어낸 것은 두 여자이지만, 서로 죽이는 것은 그 두 남자들끼리라는 결론이기도 하다. 히데코가 백작에게 술을 먹일 때 치사량만큼 먹이거나 잠들게 한 후 죽이기라도 했으면 히데코에게도 피가 묻는 일이었는데, 그녀는 속이는 것에서 그치고 백작은 코우즈키에게 넘겨진다. 그 백작에게 잔인한 응징을 하면서도, 히데코가 여자로 어땠는지 들으려고 치졸한 모습으로 담배까지 물게 해주는(자신을 죽일 담배일지도 모르고) 코우즈키는 정말 제대로 볼품없는 모습이다. 그 상황에서 히데코가 백작 앞에서 끝까지 자신을 지켰던 사실이 함께 드러나며 더 대조적인 결말이 만들어진다. 이 영화 안에 성적으로 적나라하고 한편으로 잔인한 장면들이 있었지만, 눈에 거슬리지 않았던 이유가 이러한 플롯 덕분이었던 것 같다. 자연스러웠고 각 캐릭터들과 감정선들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김민희와 김태리는 너무 예쁘기도 했다.

 

 진짜로 가짜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 숙희에겐 히데코를 속이라고, 그리고 히데코에겐 숙희를 속이자고- 모든 속임수를 맨 처음 계획했던 백작 자신이다. 처음에만 해도 정말 여자로 보지 않는다며 코웃음까지 치던 백작이 나중엔 히데코에게 사랑하게 된 것 같다며 동업자를 사랑하는 자신의 바보같음마저 인정한다. 그리고 정말 바보같이 속아 넘어가기도 하고.  

 시대며 배경이며 상징이며 여러모로 굳이 머리 복잡하게 보지 않아도 이 영화는 재미있을 만한 이유투성이었다. 장면들만으로도 하나하나 예쁜 것이 너무 많아서 눈도 즐거웠고. 늘 박찬욱감독이 상업적인 영화로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말이 이해되던 영화. 

 마음을 빼앗은 '진짜' 가짜 아가씨와 가짜에게 마음을 빼앗긴 '가짜이려던' 백작. 핑거스미스를 보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반전영화로써도 충분히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박찬욱감독이 전복의 쾌감에 대해 말한 인터뷰를 보았는데 이 영화에서 나도 그 느낌에 매료된 것 같다.
 "어렸을 때 히데코는 이모부에게 문진(구리로 된 구슬)으로 맞는다. 극 후반부에는 그 쇳덩이와 생김새가 똑같은 방울을 유희의 도구로 사용한다. 시나리오를 읽은 스태프가 왜 히데코가 역겨운 음란도서 내용을 따라하느냐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더 이상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순수한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서 ‘전복의 쾌감’을 봤다. 난 전복의 쾌감에 늘 매료된다."  

 이 영화도 어찌보면 복수시리즈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 영화가 그동안의 박찬욱감독 작품들 중에 잔인한 장면이 가장 덜 나오면서도 어떤 영화들보다도 가장 통쾌한 복수였다는 느낌이 든 이유가 바로 전복의 쾌감이 잘 살아서였던 것 같다.


   참고한 인터뷰 내용

http://www.mydaily.co.kr/new_yk/html/read.php?newsid=201606021649731124&ext=da
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0104937&cl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