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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인 파리 - 사랑이 유지되려면 필요한 것

 

'미드나잇 인 파리'. 이 영화 설정에서 길 펜더는 매일 밤 12시면 차를 타고 헤밍웨이, 피카소, 스콧 피츠 제럴드, 거투르드 스타인 등이 있는 자신이 꿈꾸던 과거로 여행을 갈 수 있는 주인공이다. 연기를 잘해서 길 펜더가 헤밍웨이를 처음 만날 때 거의 아이돌 만나 성덕이 된 팬의 얼굴을 보는 듯 했는데ㅋㅋ 어쨌든 길 펜더가 현실에 있을 때와 1920년대에 가 있을 때 황홀한 얼굴 표정과 반짝거리는 눈빛에서 행복감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와 비슷하게 영화 초반에서부터 길 펜더와 약혼녀인 이네즈의 색깔 차이도 확연하게 보인다.

사소한 것들은 맞는데 중요한 것들이 안맞는다면

길 펜더에게 이네즈는 섹시하고 매력있는 여자이고, 얼마나 오랜 연애기간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약혼하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사랑하는 연인 관계다. 그런데 그 연인 관계는 파리에 와 하나하나 드러나는 서로의 차이 속에서 외적, 심적 갈등을 마주한다. '사소한 건 잘 맞는데 중요한 게 잘 안맞는다'는 것이 나중에 길 펜더가 하는 말이다. 사소한 것이라면 음식 취향 같은 경우는 서로 일치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작 인생에서 각자가 행복해하는 것들이 상대방에게는 시시한 일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경우인 것이다.

네 명이 같이 다닐 때 길 펜더는 혼자 너무 다른 것이 느껴진다. 폴의 허세와 지식 늘어놓기에 이네즈와 캐롤은 똑똑하다며 감탄하지만 길 펜더는 심드렁하다. 반면에 길 펜더가 정말 재밌고 들떠서 하는 이야기들에 이네즈는 쓸데없는 소리라고 말한다. 길 펜더에게 '비 내리는 파리의 거리'는 안걷기엔 너무 아까운 분위기 좋은 거리인 반면 이네즈에겐 '미친 짓(왜 택시를 안타?)'이다. 길 펜더가 고심해서 고른 목걸이를 이네즈는 촌스러워서 하지도 않고, 오히려 또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 귀걸이를 선물할까봐 얼굴을 찡그린다. 소설은 길 펜더에게 꼭 쓰고 싶은 자신의 꿈과 같은 것이고 이네즈에게는 현실성을 잃은 방황처럼 보인다. 길 펜더는 그렇게 자신의 취향과 행복을 모두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어느날 술에 취해 차를 타고 1920년대에 돌아가 자신의 취향과 비슷하고 또 인정해주는 사람들을 만나 빠져들게 된다.

 영화 설정 중에 재미있던 것 하나는 길 펜더가 자신이 여행한 1920년대의 행복과 황홀감을 이네즈에게도 너무 보여주고 싶어서 같이 차를 기다리는데, 기다리다가 싫증난 이네즈가 떠나고 나서 바로 차가 온다는 것이다. 나중에 아드리아나와 같이 있을 때엔 둘을 같이 1870년대로 데려가주는 차가 섰던 걸로 봐서, 그 시대를 동경하는 사람들만 선택되는 것인가 싶은데. 어차피 이네즈는 그 차를 타고 1920년대에 갔었어도 길처럼 행복해하며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없었을 거였어서,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시간여행을 믿을 수 없으니 나중엔 헤밍웨이를 만났다는 길 펜더를 정신병에 걸린 것처럼 보게 되는 점이 안타깝긴 하지만.

길 펜더는 1920년대에서 여러 예술가들조차 뮤즈로 삼고 유혹되는 아드리아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현실에 돌아와서는 혼란스러움과 죄책감에 '두 명을 동시에 사랑하는 게 가능한지' 묻기도 한다. 그 질문을 하던 시점에 길의 감정이 정말로 이네즈와 아드리아나를 동시에 사랑하고 있던 게 맞는지, 아니면 이네즈에 대한 감정은 약혼녀로서 미래를 약속한 의무감에서 남아있던 것일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길 펜더에게 있어 아드리아나는 소설 초입부부터 몰입되었다며 자신의 영혼과도 같은 부분을 알아봐주는 여자이고, 이네즈는 소설 주인공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듣고도 시시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여자니까. 이네즈 앞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무시받는 듯한 느낌이었을 길에게 아드리아나는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 사랑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뭘까.

우리를 대부분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유지'에 대해서이지 '사랑의 시작'에 대해서는 아닐 것 같다. 시작은 어렵지 않다. 만약 사랑의 시작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도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유지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까지 끌어와서 하고 있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사실 정말 '사랑의 시작'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라면 그건 감정 자체에 대한 확신부터 없는 것일테고 결국 그 사랑은 시작되기 어려울 것이다.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더 쌓여서 어느날 감정에 대한 확신이 생기면 그 땐 '사랑을 시작해야지'라는 이성적인 판단과 상관없이 감정적으로 사랑은 시작될테고. 

 그런데 '사랑의 유지'에 더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약혼했다가 깨진 길과 이네즈처럼, 현실에서는 아무래도 결혼이 '사랑의 유지방법'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길이 끌렸던대로 비슷한 취향? 자신에 대한 인정? 혹은 비슷한 환경 조건? 비슷한 미래 계획?

 또 반대로 나와 비슷하지 않고 달랐으면 좋겠는 성격이라던지. 자신의 단점을 보완해줄 장점이라던지. 뭐가 더 중요할까.

 

 30대가 되어서 셀 수 없이 해보게 되는 고민인데, 결론은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 점은 서로의 '행복의 종류'가 같을 필요는 없지만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는 있어야한다는 것. 그러니까 적어도 상대의 행복이 내게 싫은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네즈는 감성적인 길과 다른 성격인만큼 길의 단점을 보완해줄 장점을 가지고 있고 그게 매력인 여자이기도 할 것이다. 이네즈가 길과 사랑하기 위해 소설을 좋아하거나 비오는 거리를 좋아하며 감상에 젖을 필요는 없다. 다만 둘이 행복할 수 없던 이유에는 나와 '다른 상대방의 행복을 부정하는 태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네즈는 길이 좋아하는 소설과 비오는 거리에 대해 시시하다고 생각하고 바꾸길 원하기도 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길이 이네즈를 1920년대로 데려다주고 싶어하는 건 정말 이네즈를 사랑해서 자신이 느끼는 행복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인건데, 이네즈에겐 헛소리와 감상 젖은 이야기 정도로 치부된다. 그리고 파리에 살고 싶어하는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30대의 두 명이 만난다면 그건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서로 다르게 살아온 두 인격체가 만나는 것이고, 서로 달라도 엄청 다를 수밖에 없다. 얘기하다보면 취향이 맞고 공통점이 많다고 느끼는 소울메이트들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같이 살아보면 사소한 하나 하나에서 '서로 다른 사람'임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겪게될 것이다. 한 집에서 태어나 같이 자라는 일란성 쌍둥이조차도 커서 보면 서로 매우 다른 사람들이 되어있는데. 서로 다른 환경과 다른 사람들을 겪어온 성인들이 '평생을 함께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수많은 차이를 받아들이고 인정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맞춰나간다'는 말보단 '인정해나간다'는 말을 쓰고 싶다.

닮은 점들은 서로의 동질감을 높여줄 것이고, 아마도 갈등이 생긴다면 그건 다른 점들을 얼마나 서로 잘 받아들이냐에 달려있을텐데. 그 '차이들' 중에는 서로 다르다는 게 매력이고 장점이어서 더 끌리는 요소들도 있을 것이고, 어떤 점들은 상대방을 괴롭게 해서 타협하고 바꾸어나가려는 노력도 거칠 것이다.

 행복하고 싶은 마음으로 함께 사는 거니까 서로의 다른 행복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할텐데, 일단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나갈 용기와 그만큼의 애정이 원동력이 되어주어야 할테고. 너의 행복의 종류는 내 행복의 종류와 달라도, 너가 행복해서 내게도 그게 행복이 될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이네즈는 '소설을 쓰는 행복' 자체를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소설을 쓰며 행복해하는 길'의 모습을 좋아할 수는 있어야했다. 아니면 반대로 길에게 있어 '소설을 쓰고 파리에 사는 것'이 행복의 큰 지분을 차지하지 않았었더라면 이네즈가 그런 점을 무시하는 것이 큰 상처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사회생활용 가면을 벗어던지고도 안전할 사랑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나' 보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날 때 비로소 믿어질 것이다. 길이 잘나가고 돈 잘버는 시나리오 작가보다도 소설가로서 더 인정받고 싶었고 그런 면을 이해할 수 없는 이네즈로부터 결국 멀어졌듯이. 서로에게 처음 주의를 끌고 반하게 하는 것은 화려한 표면에 다 붙어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쌓여가며 애정하게 되는 면들은 대부분 초반엔 쉽게 보여줄 수 없는 여린 내면들에 있다. 아무하고와는 나눌 수도 없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그렇지만 이 세상 한 두명 정도는 알아주길 바라는 각자의 여린 속살같은 내면들.  

결국 아름다운 것은, (미래의 누군가에게 아름다울) 지금 현재라는 것  

 '시간'이라는 개념이 재미있는건, 그 흐름을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그렇기에 우리 모두를 공평하게 무력하게 만든다는 점 아닐까. 전세계의 시계를 고장내버린다고 해도 시간은 흐를 것이고, 백만장자가 수천억을 지불한다고 해도 자기 앞의 시간을 남들과 다르게 가도록 설정할 수는 없다. 심지어 이 영화의 판타지 설정에서도 길펜더가 1920년대로 시간 여행을 가있는 동안 2010년대 시간은 함께 흐른다. 만약 길펜더가 2010년대의 시간을 멈추어놓고 1920년대에 다녀올 수 있었다면 밤에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에 대한 의심도 피해갈 수 있었겠지.

 

 시간 개념이 인간의 통제능력 너머에 있다는 점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만큼 역설적인 자유(어쩔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를 주기도 한다. 이미 지나간거 어쩔 수 없잖아? 라는 한마디로 퉁칠 수 있는, 퉁쳐버릴 수밖에 없는 과거라던지.(비록 감정적으로 이렇게 쿨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누구도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고, 미리 살아보려고 미래를 당겨올 수도 없다. 다만 어떤 현재는 잘 지나가서 다행인 과거가 될테고, 어떤 현재는 후회로 돌이키고 싶은 과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간에 그 시간을 통과해온 우리들의 결과적인 감정일뿐이지, 실제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현재를 사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결정권 없는 결정. 이렇게 흐르는 시간 앞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이, 때때로는 인생의 무게 앞에서 그나마의 심적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면 그건 내가 이상한걸까.

 어쨌든 시간은 계속 흐르는 것이기에 지금 바로 이 순간도, 1초가 지나면 1초가 지난 과거가 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순간도 내일이 되면 하루 전날인 과거가 된다. 이렇게 '현재'는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상 '눈 한번 깜빡 하면 곧바로 과거'가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재에서 과거를 동경한다해도, 지금의 불만족스러운 현재 역시 미래 앞에서는 동경할만한 과거가 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2010년대에 사는 길펜더가 1920년대를 동경하며 살아보고 싶어하고, 바로 그 1920년대에서 살고있는 아드리아나는 1870년대 벨에포크 시대를 동경하며 그녀의 현재인 1920년대를 지겹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알고보니 1870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역시나 더 과거인 르네상스 시대를 황금의 시대로 뽑으며 1870년대 현재의 아름다움에 대해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길펜더는 자신에게 아름다운 1920년대를 두고 1870년대에 남겠다는 아드리아나를 보며 '과거에 살았다면 행복했을 거라는 상상을 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꿈꾸었던 과거도 현재가 되면, 더 과거를 꿈꾸게 만드는 현재일 뿐'이라고, 직관적으로 풀어보자면 과거들도 모두 부정하게 되는 허무한 느낌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점만 대치해서 같은 말을 반복해본다면 과거들을 부정하는 대신 현재를 긍정하게 된다. '지금 아름다운지 모르겠는 현재도 과거가 될테고, 그게 미래에서 돌아보면 아름답다고 동경할만한 시점' 어딘가일테니까. 길펜더가 시시하게 느끼는 2010년대가 몇년 후를 사는 미래의 누군가에게 돌아가고픈 과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 속 각 시대의 사람들처럼 그리고 현재의 우리들처럼, '언제든 아름답게 평가될 힘을 가진' 각각의 현재들을 몰라보는 것은, 당연하고 익숙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지금 현재인 2020년 7월에 1년 전을 돌이켜 2019년 7월을 떠올려볼 때, 외출 때마다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었던 그 때의 행복에 대해 제대로 알며 살던 사람이 있었을까. 모두가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그때만 해도 너무나도 당연한 현재였을 뿐이지, 1년 후인 지금의 코로나시대에서 그리워할만한 '아름다운 현재'가 아니었으니까.

길 펜더는 결국 현실에서 약혼자와 헤어지고, 운명처럼 새로운 여자를 만나게 된다. '운명처럼'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감독이 노골적이면서도 그래서 아름다울 수밖에 없게(ㅎㅎ), 그녀와 눈이 맞는 순간 비를 내려주기 때문에. '봐 이 사람이 너의 운명이야!!'라고 말하듯이 비내리는 거리 걷기를 좋아하는 길 펜더의 취향 저격을 제대로 할 기회를 준다. 그 새로운 운명 둘이 함께 비내리는 거리를 걸어가며 영화가 끝난다. 물론 새롭게 사랑을 시작한 그 둘 앞에도 그 사랑이 유지되기 위해 넘어야할 장벽들이 하나둘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더이상은, 길 펜더가 현실의 장벽 앞에서 1920년대로 돌아가는 차를 타는 일 없이 현실을 마주해나가는 연인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