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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들을 위하여

 당연한 것들을 위하여

 

 

 요즘 홍대를 자주 다니다보니 엄청난 인파속에도 자주 노출된다.

 주말은 진짜... 지하철 출구에서부터 바로 못나가고 긴 줄을 서는데 앞에 연예인이라도 와있는 줄...

 그러다보니 낯선 사람들 곁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회가 불안하고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겠구나 갑자기 끝이 날 수도 있을 삶이 가까이 다가와 불안했던 

 2014년 말에 썼던 글이 문득 기억나서 여기로 옮겼다. 물론 지금은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이겨서 또 불안에 무뎌져있지만.

 


 

 아마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 정말 갑작스럽게, 내가 쓰는 말들이 너무나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져서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다. 빨간 저 과일 이름이 왜 ‘사과’지? ㅅ,ㅏ,ㄱ, ㅘ, 사과, 사과....? 정말 괴상하고 요상한 일이지만, 갑자기 저 빨간 과일을 당연한 듯 사과라고 부르고 있는 내가 이상했다. 그 빨간 과일이 ‘내가 왜 사과야?’ 라며 날 빤히 쳐다보는 느낌이랄까. 처음 느껴본 당황스러움에 휩싸여 각종 명칭들을 혼자 바보처럼 소리내어 중얼거려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낯선 말들이 내 뇌 안에 다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더해 10년이 넘게 당연시하다가 그제야 의아해진 나 자신이 충격이었다. ‘낯설고 신기한 공포’라고 표현한다면 좀 비슷하려나. 그 순간 덮쳤던 느낌을 도무지 형용하기 어렵다. 다만 그 후로 몇 번 더 겪어보며, 그것이 ‘당연하게 느끼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에 오는 느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릴 때에야 내 생각뿐만 아니라 쌓여온 삶 역시 얕은 것이기에 가볍게 넘어갔지만, 커갈수록 확고한 내 세계가 형성된만큼 내가 생각해온 당연함이 흔들릴 때의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딸인 줄 알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친딸이 아니었다 식의 막장드라마처럼 갑자기 충격적인 사실이 인생에 끼어드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늦게 알아챘다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내 삶속에 딱맞는 퍼즐조각인 척 끼어져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게 흔들리면 내가 지금껏 알고 있던 삶도 통째로 흔들렸다. 당연하던 무엇이 갑자기 깨지는 순간들은, 느닷없이 찾아오기도 하고 특정한 계기를 두고 찾아오기도 했다. 어떤 방식이든 그 순간이 찾아오면 어릴 때처럼 가만히 놀라기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내 삶속에서 당연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아진 사태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했다. 그동안 왜 이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는지부터 오답노트의 시작이었다. 너무나 당연해서 왜 당연한지 생각조차 해볼 이유가 없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순간마다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 자체보다 여태까지 내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단 사실이 더 날 놀라게 했다.

  이렇게 말하면 삶 속에 녹아있는 당연함이라는 것들이 뭔가 거창할 것 같지만 알고보면 우리 각자의 마음에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품고 있던 당연함들이란, 연약한 내 마음에 뿌리내려 화초처럼 자라면서 내 마음이 바라보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조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내 마음 맞춤형으로 자라면서 내가 이 세상을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는 역할이랄까. 대학생이 끝나갈 무렵 깨진 당연함은 ‘낯선 사람들 곁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기’ 였다.

 

  그 날따라 시내에 사람들이 북적거려서 몇몇을 스쳐 지나가야했다. 그런데 조금씩 불안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옆을 스쳐가는 사람이 갑자기 나를 칼로 찌른다거나 염산을 뒤집어 씌우지 않을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스쳐가는 사람들 차림새나 행동을 훔쳐보며 내 불안을 병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해볼 찰나였다. 갑자기 그런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이런 불안을 20년 넘게 못느끼고 살아온 내가 더 이상하고 신기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누군가는 정신과진료를 권유할지도 모르지만 무슨 근거로 그동안 생전 처음 보는, 아무 정보도 없는 수많은 타인들을 믿고 돌아다녔던 것인지 당황스러웠다. 사실 밖을 돌아다닐 수도 없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언제부터 왜 낯선 타인에 대한 믿음을 당연시해온 것일까. 물론 이 생각으로 정말 밖을 못 돌아다니면 정신과적으로는 피해망상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하지만 요즘은 밖을 못 돌아다닐 정도는 아니더라도, 타인이 갑자기 날 해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종종 덮치는 게 정상적일만한 세상 아닌가. 실제로 그렇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믿음들을 무참히 짓밟는 사건들이 자꾸 발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끼리 서로에 대한 정보도 구체적 근거도 없으면서 안심하며 돌아다닐 수 있는 게 왜 당연시되며, 누군가 날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은 왜 당연한 게 아니라 망상으로 분류되어야 하는걸까. 아직 의대생 신분이니 자세히 배운 게 없지만 아무래도 ‘병’이라는 것은 보편적이지 못한 쪽으로 결론이 날 것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공포를 가지지 않고 산다는 사실 때문인 것 같았다. 당연히 사람이 커가는 과정에 대한 맞춤형일 것이다. 아기 때는 자기보호를 위해 남을 적으로 간주하는 본능으로 낯가리고 울다가, 어느 시점을 지나면 낯선 사람이 안아도 울지 않는다. 태어나 아기 때부터 양육자 없이 혼자 생존하기란 불가능하며 커서도 서로의 도움이나 사랑이 필요하기에 경계를 늦추고 믿음을 주고받는 게 살기 위한 본능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편으론 남이 나를 해칠 것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산다는 것 자체가 힘겨운 일이어서라도, 그 생각을 억제하는 방어기제를 모두 갖추게 될 거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우리의 본능은 잘 살아갈 수 있게끔 맞추어져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내가 당연하게 느끼던 것을 깨게 된 이유는 변한 세상맞춤형이었다. 잘 지내다가 갑자기 당연한 듯 사람을 믿어온 나 자신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동안 유난히 사람을 믿고 이상주의자였던 내게 본능적인 경고신호가 작동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는 누군가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으면 추워서일 거라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으면 마트를 다녀오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요즘은 한번씩 ‘혹시’ 하며 뉴스에서 보도된 사건을 떠올려보게 된다. 끔찍한 사건 보도가 잦아질수록 불안수치도 올라간다. 안전한 사회에서는 경계심을 늦추는 것이 행복하고 화목하게 살기 위한 방법이겠지만 위험한 사회에서는 경계심을 강화시키는 것이 생존방법으로 당연한 일일 테니까. 의식적이든 아니든,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사회 현상의 간접경험을 통해 사람에 대한 당연한 믿음을 강제 해제당하고 있지 않을까. 물론 무엇이든 과도하면 병이듯, 일상생활이 무너질 정도의 방어적 태도는 치료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생각도 든다. 정말 세상이 안전해제에 무차별한 사고가 당연한 듯 이어진다면 그 땐 피해망상을 가지지 않는 것이 망상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불안불감증 같은 종류로 말이다.

 

  이 또한 씁쓸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요즈음 내가 당연하지 않게끔 자꾸 되뇌여보는 주제는 ‘내가 당장 죽지 않으리라는 믿음’이다. 올 해 가슴아픈 죽음들이 유난히 많았고 우리 모두가 노출되며 간접적인 경험을 했다. 사건사고 자체로도 답답하고 분노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그에 더해서 죽음이 언제든 무차별하게 닥칠 수 있다는 현실이자 사실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점 역시 많은 사람들의 삶을 흔드는 데 한 몫 했을 것 같다. 죽음이라는 게 언제든 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게 당장 자신이 될 거라는 진정한 생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난 솔직히 그러지 못하고 있다. 내가 매일 그런 생각으로 산다면, 늘 후회없는 하루를 살아 성공하기보다는 오히려 후회가 없을만하게 하루를 보내야 하는 부담에 쫓기는 하루를 살아갈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생각하기가 더 힘들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인지하고 살려면 어디 슬퍼서 살 수가 있겠는가. 나처럼 누구나 어느 정도의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위해 당연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당연시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그 당연함을 깨려는 듯 세상이 자꾸 경고를 준다. 현실직시야 중요하지만, 한편으론 당연시해도 살만했던 세상이 그렇지 않은 세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 슬프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당연함들이 깨져갈까.

 부디, 끝내 사랑까지 건드리지는 않기를......  당연한 것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