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나를 가로막고, 용기없는 누군가가 나일지라도...
프로이트와 융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개인심리학의 창시자이며 심리학 제3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알프레드 아들러.
그의 심리학을 접할 수 있는 두 권의 책을 읽었다.
먼저 읽었던 것이 '항상 나를 가로막는 나에게', 최근에 읽은 것이 '미움받을 용기'.
'항상 나를 가로막는 나에게'는 아들러의 말들 중 현대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을 골라 엮은 것이고
'미움받을 용기'는 일본의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와 작가 고가 후미타케가 아들러 심리학을 질답하는 ‘대화체’로 정리한 책이다.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에 익숙했던 내게 '항상 나를 가로막는 나에게' 는 재밌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정도였다면
'미움받을 용기'는 흥미로우면서도 물음표와 거부감을 함께 가져오기도 했다.
어느 쪽도 정확히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아들러에 대한 두 책을 읽은 후 드는 생각들을 잊기 전에 정리해보고 싶다.
1. 감정에 의한 행동인가, 행동(목적)을 위한 감정인가
특히 오늘날 상식처럼 되어버린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개념에 대한 비판은 거의 돌직구 수준이다.
트라우마와 같은 프로이트식 원인론은 과거의 특정 한 사건만을 선택해 현재 자신의 복잡한 문제를 합리화하려는 아주
'저렴한 시도' 라는 것이다. 어떻게 과거의 트라우마적 경험이 현재의 내 삶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도록 놔둘 수 있느냐는 이야기다.
'미움받을 용기' 에서는 감수를 한 김정운교수의 말처럼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개념이자 결정론 식의 이야기를 강하게 부정한다.
아들러의 이야기는 '목적론'이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를 결정하고 또 묶어놓는 것은 경험(즉 트라우마)이 아니라, 그 트라우마를 해석한 나 자신, 나의 목적이라는 것.
'미움받을 용기'에서 청년이 예를 드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두 가지로 해석한다.
과거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은 트라우마로 인해 방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갇힌 듯이 지낸다는 소년.
프로이트측에서 본다면 그 친구는 트라우마로 인해 내면에 만들어진 불안과 공포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가 되고
아들러측에서 본다면 그 친구가 '나가지 않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나가지 않는 것이며,(그에게 그것이 선이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 같은 감정은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가 된다. 여기서 그가 정상적인 생활을 포기하면서
까지 '나가지 않겠다'는 목적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나가지 않음'으로써 얻는 이득이(이것이 그에게 선) 있어서라고 설명한다.
상처받은 자신의 모습이 주변으로부터 관심과 걱정을 받을 수 있고, 또 누군가를 걱정시키기도 하는 이득.(일종의 복수일 수도)
물론 그 목적이라는 것은 그 소년에게 있어 무의식적인 계산 하에 생긴, 자기 자신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있는 종류일 것이다.
만약 남들처럼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싶지만 불안과 공포 때문에 나갈 수 없어 힘들다고 호소하는 그에게
"네 진심은 나가고 싶지 않은거면서 왜 못나가는 것처럼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거야!" 라고 하면 심하게 반발할테니 말이다.
그 소년이 직관이 있다면 그 심한 반발심과 동시에 '아 내가 그런거 같기도..' 하는 무의식의 의식화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감정에 휘둘린다'는 표현이 있기까지 하듯이, 우리는 감정이란 것이 우리의 의지 이상의 영역에서 발생하고 그 감정에 따라
우리가 행동하게 된다는 생각에 더 익숙하다.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낯설고, 충격적일 수 있다.
갑자기 화가 나서 큰 소리를 내게 되는 상황만 해도, 아들러는 우리가 분노라는 감정에 의해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소리를 지르려는 목적으로 분노라는 감정을 수단삼고자 만들어낸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지르려는 목적은 상대를
제압하는 데 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아들러에 의하면 '화가 나서 어쩔 수 없이 소리를
질렀다'는 말은 거짓말이 된다. '분노'는 소리를 지르기 위한 목적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철학자는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분노 이외의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걸세.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배우게. 분노란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도구니까.
목적을 위해 감정과 증상을 만든다는 아들러의 생각은 '항상 나를 가로막는 나에게'에 나오는 구절들에도 담겨있다.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환자는 자신의 증상을 자신의 의도대로 만들어낼 수 있음을.
절대적 감정이란 없다. 모든 감정은 속해 있는 환경의 최종 목적에 따라 그 표정을 계속해서 바꾼다.
모든 감정과 행동에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감정을 그 목표 달성에 맞게 적응시킨다.
여기서 누구의 생각이 옳은지에 대해 따져보자는 것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같은 물음보다 훨씬 흥분되는 일이다.
누군가는 그동안 믿어왔던 자신의 일부와 세상을 깨버리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아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나는 불행의 피해자인가, 주동자인가
이 책들에는 아들러의 심리학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가르침이자 용기를 주는 심리학이라고 표현 되어있다.
'미움받을 용기' 에서는 제목에서부터도 강조하지만, 다음과 같은 표현이 몇 번씩 나올 정도로 용기 이야기를 많이 한다.
미움받을 용기. 행복해질 용기. 평범해질 용기.
나는 이 책이 '네가 할 수 있어'라고 어깨 토닥여주는 지침서로만 보이진 않고, 개인의 상황과 역량에 따라 차갑고 냉정한
지침서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용기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말을 자세하게 말하면,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용기의 심리학'을 긍정적이고 힐링적인 자세로 받아들이자면
트라우마를 겪으며 벗어날 수 없는 불행에 빠져있다고 믿었던 내 인생을 내가 바꿀 수 있다는 희망, 이지만
조금 덜 힐링적인 자세로 받아들이자면
당신이 현재 행복하지 못하고 잘 살고 있지 못한 것은 순전히 당신 탓, 이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것 아닌가.
자신의 트라우마가 꽤나 버겁고 '인식을 바꿔보는' 저항을 하기에 무기력한 사람에게는 현실에 대한 가혹한 해석일 수도 있다.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자네는 인생의 어느 단계에선가 '불행한 상태'를 택했어. 불행한 운명으로 태어나서 그런 것도, 불행한 상황에 처해서 그런
것도 아닐세. '불행한 상태'를 자신에게 '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즉 '행복하지 않고 불만스러운 현실'은 변함으로써 생길 불안이 더 커서 용기내지 못한 자신의 선택. '불행한 상태'의 선택이라고
요약이 된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는 트라우마라는 말을 이용해 현재 나의 불행에 대해 면죄부를 받는데에 실패하고, 탓할 곳
을 잃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그게 뭐가 문제야, 아들러의 말처럼 용기를 내서 이 불행해왔던 현실을 바꿔나갈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이고 힘이
되는 말이야!' 라고 별일 아닌 듯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꽤나 힘겨운 트라우마에 눌려 살아온 사람에게 있어서
불행의 원인을 탓할 '나 이외의 무언가'가 사라져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스물 초반에 내가 맞았던,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던 충격적인 그 때는, 바로 의심의 여지없이 그동안 믿어온 내 불행의 주체가 바뀌는 그
깨달아짐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다르게 해석할만한, 아들러가 말하는대로 변화를 선택할만한 용기 없이 '익숙한 불행' 속에서 뒹굴고 있던 나는
조금 진정이 된 채 한 걸음 내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좌절감과 허무함에서 헤어나오기 힘들었다.
그동안의 불행이 나의 선택이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내게 나는 트라우마로 인해 너무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행에 대해 나의 힘들었던 오랜 시간들에 대해 트라우마의 가해자 탓을 해야 살만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의 내게 '계속해서 불행하기를' 내가 택해왔다는 사실은 '그럼 내가 바꿀 수 있겠구나' 라는 희망이 아니라 더욱
절망적인 '노답'일뿐이었다. 내가 이 길고 긴 불행 속의 피해자가 아니라 주동자였다면 그야말로 '더욱 극복해낼 수 없을'
불행으로 믿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든 시간들을 겪어온 게 나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 '벗어나지 않기'를 택해온,
그럴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이유가 내 안에 분명 있을 것이니 말이다. 차라리 깨달아지기 전처럼, '복수라도 하면 이 불행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고 복수하지도 못할 거면서 가졌던 희망이 더 희망적이었다.
다행히도 현재의 나는 실컷 '익숙한 불행'에서 구를만큼 구른 후 빠져나온 상태이기 때문에
아들러의 말처럼 나를 가로막고 있던 나를 받아들이고 불행의 주동자이던 나도 결국 받아들일 시간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완전히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아들러의 말이 내가 깨달았던 당시처럼 받아들여지고 믿겨지지만 여전히 그러한 생각에 거슬리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3. 트라우마는 단순한 불행의 씨앗이 아니다
많이 걸어가면 없던 길도 만들어지듯이, 뇌 안에도 같은 감정이 반복되다보면 그 감정이 쉽게 흐르는 회로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내가 받아들인 불행의 주동자가 나라는 점은, 분명 오랜 시간동안 그 감정을 반복하며 선택하고 벗어나지 않은 게 나라는 부분이
었다. 내 트라우마의 주인공이 '넌 영원히 이 일만 생각해라' 하고 최면을 건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내가 그 사람의 요구를 따를 일도
아니니 말이다. 내 내면에 그 트라우마에서 오랜 시간동안 벗어나지 않을 이유가 있었고 그래서 내가 택해온 것임을 인정하게 되
었다. (트라우마가 만들어내는 집착에 대한 내 생각은 나중에 따로 쓸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불행 원인에서 '트라우마'를 배제시키는 강력한 주장은 뭔가 못마땅하게 느껴진다.
트라우마의 '발생' 만큼은 분명 자기 탓이 아니다. 자연재해로 죽을 뻔한 경험을 한 후 생긴 PTSD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서
그 자연재해의 발생이 사람 탓이 아니듯이. 애초에 발생조차 안했으면 더 좋았을 그 트라우마 자체가 분명 불행의 씨앗이다.
그 씨앗에 물을 주며 얼마나 더 크고 긴 불행으로 쑥쑥 키워왔는지는 본인의 손에 달려있었겠지만.
내가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트라우마에서 오랜 시간동안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
중증 정도를 따지기는 애매하지만 트라우마라고 개인에게 느껴질만한 상황이 있었던 사람에게는 애초에 마음이 다른 버전으로
바뀌는 일이 발생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열이 가해지면 단백질이 변성되듯이, 마음도 트라우마가 가해짐으로써 보통 상태에
(트라우마가 있기 전) 변성이 온, 그래서 '정상 상태에서 이미 어느 정도 벗어나진' 마음에서 그 후가 출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트라우마로 받아들여질 정도의 일일 때 그것에는 필연적으로 '쉽게 벗어나지 않게끔' '집착하게끔' 하는 심리적 유도
장치 같은 것이 설정되어 있는 것 같다. 현실의 자신은 고통스러워서 자기가 어떻게 트라우마를 만지작거리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무의식이) 선택해 갈만한 이유 제공이랄까.
이것에 대해 여기서 더 풀고 생각하다간 토할 것 같아서 그만두어야겠다.
어쨌든 트라우마의 발생이 단순히 '사건 제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 발생 전과 '다른 버전의 마음'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대해 나는 트라우마를 배제한 채 '현재의 나'만 탓하는 건 대놓고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 생각이 아무 과학적 근거없는 소설이자 결국 나에 대한 또 한 번의 얄팍한 변호로 보일지 모른다고 해도(이건 일부 인정)
항상 나를 가로막는 것이 나이고, 행복하지 못한 삶의 가장 큰 이유가 용기없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한 때의 나처럼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더 깊은 좌절에 빠지게하는 절망적이고 자조적인 의미가 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억지로 아들러의 말을 희망적으로 받아들이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그저 그동안 이유모를 내 감정들에 대한 불안으로 자기 자신을 흔들어왔다면, 이제 좀 안심하는 정도 어떨까.
밝고 기쁜 감정이 아니라 우울하고 어둡고 때론 나쁜 것처럼 보였던 감정과 증상들이 실은,
내 안의 똑똑한 무의식이 내 마음을 살리고자 필요하다고 철저하게 계산해서 만들어낸 것들이었다고.
이유없는 것도 헛된 것도 쓸데없는 것도 없었으며
누군가 약해빠진 나를 가둬두고 휘둘렀던 게 아니라
나를 위해 내가 만들어온 것이었다면, 어쩌면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한 존재이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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