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은 후부터 김초엽이라는 작가의 다음 작품을 설레며 기다려왔고,
그렇게 맞게 된 책제목이 '사이보그가 되다'라니 어떤 내용일지 궁금증을 마구 유발해버려서,
이 책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고민없이 바로 사게 되었다.
이번 책은 김초엽씨의 이전 작품과 같은 SF소설은 아니고, 김원영씨와 김초엽씨가 함께 '장애'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풀어나간 글이다. 실제로 2018년 김원영씨가 김초엽씨에게 제안하는 이메일을 보내고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책의 마지막에는 둘의 대담을 대화체로 담았다. 일단 이 두 분의 멋진 만남에 진정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덕분에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었던 독자의 마음으로.
산지는 꽤 되었는데(두달 이상?) 이렇게 읽고 독후감을 쓰기까지 오래 걸린 이유는, 다 읽는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그 이유는 책이 두꺼워서가 아니라, 내용 자체의 밀도가 내게 빨리 읽어내리기에 높게 느껴졌기 때문.(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장애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내게 김초엽씨, 김원영씨가 이야기하는 장애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고 새로운 세계여서 나를 당황시켰고 천천히 읽어내려야 한다는 약간의 의무감을 주었다. 최대한 이해해보고 싶으니까. 한편으론 현실적으로 내게 완전히 와닿기에는 거리감이 있는,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세상의 이야기들이었으니까. 또한, 의사인 내게 이런 장애에 대한 이야기들이 생각보다 너무 낯설다는 점이 충격이기도 했다.
이렇게 밑줄을 많이 그으며 책을 읽기도 오랜만이었다. 내가 살아오며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그들의 생각들에 놀랄 때마다 밑줄을 긋고, 아 이건 기억해둬야지 나중에 또 읽어봐야지 하는 부분에 밑줄을 긋고, 친구들에게도 이건 얘기해줘야지 싶을 떄 또 밑줄을 긋고. 남겨놓고 싶은 몇 구절들만 최대한 꼽고 꼽아서 이 기록에 남겨놓기로 했고 부디 관심이 가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꼭 사서 정독해서 읽어보시길 추천하고 싶다.
적잖이 충격이었기에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내가 의사인데 이들의 장애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낯설어서 약간은 고통스러웠다. 그런만큼 지금이라도 이 책을 읽게 된 것에 감사해지기도 했고.
'장애'에 대한 다른 시선들
일단 책을 읽기 전의 내 머릿속에 있던 개념부터 풀어보자면... 이 책에서도 일반적인 시선으로 언급되긴 하지만 특히 의사인 나에게 있어서, 그동안 '신체/정신적으로 가진 장애'와 그로 인한 '결손'은 '치료와 재활을 통해 정상화되어야 하는 것' 혹은 '정상에 가까워져야 하는 것'.. 그게 성공적인 것의 개념에 가까웠다. 나는 평소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많이 본다. 우리는 뇌경색 환자의 마비 치료를 위해 재활의학과에 빠른 컨택을 하고, 선천적으로 문제가 있는 환자들에게서도 그들의 일상 생활 중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최대한 신체적인 치료를 통해 교정해주고자 한다. 그게 환자를 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가까워지게 만들어주는 '치료'라고 생각되니까.
그런데 이 책에서는 선천적인 원인이든 아니든간에(아무래도 선천적인 원인인 경우가 더 많을 것 같지만) 장애를 '교정해주어야 하는 결손'이라고 생각하는 개념부터가 틀린 것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 세상은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비장애인들의 시선에 맞추어져 있다. 듣지 못하던 아기가 의학기술을 통해 처음 엄마 목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환하게 웃는 표정을 보여주는 유튜브영상이 엄청난 조회수와 좋아요를 받으며 '감동 영상'으로 기록되었지만, 이 책에선 그것도 일종의 비장애인들의 시선에서 확인되는 감동포르노일 수도 있다는 새로운 시선을 알려준다. 실제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처음 소리를 들을 때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고, 공포나 스트레스를 느낄 수도 있고, 꼭 청각장애가 아닌 어떤 장애든 거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사람들은 그 장애가 교정되는 것에서 더 낯섬과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장애를 고쳐내며 정상화(라는 개념도 틀릴 수 있다)하여 유발하는 감동이란, 정작 장애인들에게는 어떤지 묻지도 않은 비장애인들의 바람에서 만들어진 허상일 수도 있다. 나도 그동안 저런 영상들을 보며 감동으로만 느꼈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비장애인 시선으로만 살아오고 익숙해져 있었는지를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장애라는 사회적 낙인
장애인이라고 하면 흔하게 사회적으로 쏟아지는 태도는 '배려해주어야 한다' 이겠지만 사실 암묵적으로 '동정어린 시선'이 붙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장애 때문에 힘드니까 도와주어야 하고,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 물론 여기까지는 긍정적인 효과로 작용할 수 있겠지만 사실 동전의 양면처럼 그 이면에는 '그들은 부족하다'는 비장애인으로부터의 철저한 분리 개념이 깔려있는 셈이다. 그래서 장애를 가진 이들은, 특히 청각장애와 같이 그냥 겉으로 볼 때에는 장애인인지 알기 어려운, 어쩌면 숨길 수도 있는 사람들은 '장애를 드러낼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사실은 당연하게 필요한 도움을 받으면 좋을 것 같지만, 그들은 장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배려와 함께 떨어질 사회적 낙인 때문에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장애인으로 평가되는 순간부터 사회적으로는 '부족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그 장애라는 추가된 지위 때문에 취직이 힘들다거나 다른 사소한 것에서부터 차별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도 매우 다양해서 세상엔 선택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는 장애가 있다는 것과, 또 장애인들이 심리적으로 어떤 갈등을 겪게 되는지... 이런 내용들 또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장애를 드러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필요한 도움을 얻는 것)과 낙인을 비교할 수밖에 없고, 많은 경우 장애를 숨기고 비장애인으로 패싱되는 것을 선택한다.'
'장애(disability)는 단지 몸의 특정한 기능이 결여(dis-ability)된 상태가 아니라 '정상이 아닌 몸'이라는 사회적 평가를 획득한 일종의 신분(지위)에 가깝다.'
장애란 것은 의학적 기술과 과학 기술이 발전한다고만 해서 극복되어갈 것이 아니었고, 또 반드시 극복되어가야 할 것만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인생이 진정으로 어떤가인데 아직 그들의 목소리는 세상에 깊게 반영되지 않고 있다. 책 후기를 쓰다보니 이 책을 모두가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추천 정도로만이 아니라 강력하게 든다. 왜냐하면 비장애인 중심화되어 있는 이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의 삶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에 크게 달려있을 것 같은데, 그 이해란 게 이런 책들을 읽지 않고는 주변에서 접하지 못한다면 일상에서 참 쉽지가 않으니까.
구체화되지 않은 낙관론은 현실의 고통을 축소해버린다. 이 말을 계속 기억하고 싶다.
밑줄 친 몇몇 구절들...
장애가 있다고 규정된 우리의 몸을 쉽게 부정하고 치료하고 구원하겠다는 주장을, 그것이 설사 과학적 의견에 토대를 두고 있더라도, 우리는 신중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지금 이곳의 삶을 소외시키거나 나 자신을 온전하지 못한 존재로 규정할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우리는 우려한다.
하지만 미래가 아닌 지금 이곳에서 조금 더 잘 살아갈 가능성은 없는 걸까?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 단지 그것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기술과 의존, 기술과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장애 접근성과 장애 권리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특정한 기업이나 단체가 소외된 장애인을 위해 시혜를 베푼다는 서사만이 반복되고 있다. 이 온정의 서사 안에서 기술과 실제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장애인들의 진짜 필요는 쉽게 지워지고 만다.
장애에 관한 기술 낙관론은 장애인들이 빈곤에 내몰리는 문제를, 첨단 기술에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을 모른 척해야만 가능하다.
질병과 장애를 치료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장애를 가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장애를 치료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문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손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회의 지배적인 관점이라는 것이다. 치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관점은 현실에서 장애인들이 지금보다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장애가 부정적인 낙인의 총체로 작용하는 사회에서는 '적절한 환경과 조건에서 장애인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선택지는 사라지고, 장애는 완전한 무능 혹은 그 여부를 증명해야 하는 의심의 대상으로 이원화된다.
장애인 사이보그는 첨단 기술의 최전선처럼 조명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이보그들의 삶에는 '사이보그 낙인'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사이보그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그리는 세련되고 효율적인 삶 속에는 기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상의 불편함이 제거되어 있다. 보철물을 착용하는 많은 장애인들은 그것이 한 종류의 고통을 진정시키는 대신 다른 종류의 고통을 지불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장애는 손상된 몸을 가진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손상과 상호 작용하는 사회 및 환경이 어떤 몸을 '장애화'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읽어나가던 순간의 놀라움이란.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불완전함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술의 단서'를 찾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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