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멋대로의 입덕, 넉살 음악 들으며 넋두리
요즘 매일 하루에 10번 이상씩 듣는 노래가 있다. 출근 준비할 때, 출근길에, 일하다 쉬는 틈틈이, 퇴근길에, 남은 저녁시간에, 자기 전에... 하루종일 자기 최면을 거는 느낌으로 플레이하는 곡. 코드쿤스트 앨범 'Novel'에 있는 넉살의 organ. 사람들이 '오르간'이라고 말해서 악기 오르간인줄 알았다가, 들어본 후 장기(organ)임을 알고 나서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더 좋았고) 곡제목이 서정적인 느낌 팍 오는 오르간이 아닌, 사람의 장기일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아.. 코드쿤스트와 넉살의 조합 정말 사랑함.
쇼미더머니를 보면서 넉살에 뒤늦은 입덕. 미리 써놓자면 나는 아직 힙합에 대해 잘 모른다. 루시드폴 같은 싱어송라이터의 잔잔한 음악만 좋아하다가, 확 바뀌어서 일렉 베이스 드럼으로 다뿌시는 락밴드 공연에 빠져있다가, 다시 인디밴드들의 다양한 음악을 좋아해온... 늘 주류(흔히 말하는 멜론탑백)에선 벗어나 있었지만, 힙합은 그동안 내게 생소한 장르였다. 어릴 때부터 힙합에 대해, 욕만 많고 폭력적이란 느낌의 편견이 먼저 주입된 채로 살아와서 음악을 제대로 들어볼 생각도 못해온 것 같다. 비트메이커란 말조차 최근에야 알았다. 그래서 난 힙합 음악적인 면에서 평가할 능력은 없다. 지금 넉살을 비롯해서 좋아하게 된 래퍼들과 곡들에 대한 나의 감상은, 힙합은 어때야 한다느니 뭐 그런 생각없이 오로지 내멋대로 내맘대로 좋음을 '느끼는' 상태. 평가나 판단하는 측면이 아니라 감상적으로 빠져들고 좋아하게 된 이유들이 전부다.
그동안 잘 몰랐던만큼 내 입덕 시작에는 힙합 자체보다도 먼저 넉살이 하나의 장르로 다가온 것일수도 있다. 지금은 넉살로부터 가지들이 쭉 뻗어나가 븨엠씨에 입덕해서 컴필레이션 앨범도 사고... 다른 레이블 다른 래퍼들 다양한 곡들도 찾아 들으며 플레이리스트에 힙합곡들만 가득 차게 되었지만.
사실 내가 넉살에 입덕하는 루트는 충분히 예상가능하고 뻔한 것이었다. 시. 인상적인 가사들을 읽고, 알고보니 한때는 넉살이 시인을 꿈꿨었다는 얘기에서부터 내 마음은 입덕준비 완료였던 셈. 나는 누가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 일단 거의 무조건적인 호감이 시작된다ㅋㅋㅋ 중학교 때부터 시를 써왔고 좋아했지만 주변에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흔치 않다보니, 외로웠던만큼 생겨버린 호감루트ㅋㅋ 지금 결과적으로 넉살을 좋아하는데엔 수많은 이유가 추가되었지만 시작은 그 포인트가 확실하다.
CD 플레이어는 물론 드라이브할 차도 없지만, '작은 것들의 신' 앨범을 쭉 들어보고 주저없이 바로 구매했다. 이미 타이틀에서부터 마음이 끌렸고, 들어있는 곡들은 더더 좋았다. 나에게 뿐만이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선물하고픈 앨범. 넉살이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곡들이라지만, 아마 사람들로부터 이 앨범을 통해 위로받았다는 이야기를 쭉 들어오고 지금도 많이 듣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넉살의 앨범을 들으며 발견한 현재의 나를 기록하고 위로하는 과정이다.
# 생의 어떠한 동질감
최근에 넉살 관련 온갖 영상과 인터뷰를 다봐서 어디서였는지 기억은 안나는데, 넉살에게 팬들이란? 했을 때 '친구들'이라고 말을 했던 게 좋았었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서로 비슷한 부분이 있는 사람들일거라고 다 친구들 아니겠냐는 식의 이야기였는데. '작은 것들의 신'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위로를 주고 있는것도 그래서라고 생각한다. 넉살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랩만이 아니라 그가 음악을 통해 하는 이야기에 공감하고 있을거고, 그래서 넉살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도 된다. 넉살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뿐이지만 그 공감대에서 듣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위로를 찾게 된다. '견디고 있는 게 나 혼자가 아니구나'.
쟤가 나보다 더 힘든가? 비교하며 불행배틀로 얻는 상대적 행복을 위로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인생이지만 각자 무언가를 견뎌내며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생의 어떠한 동질감에서 얻는 위로. 그런 면에서 '힐링'이란 말을 갖다붙이고 대놓고 위로해보겠다며 만들어진 어떤 책이나 강의 같은 것들보다도, 넉살의 앨범이 좋은 것이다. 난 원래 인생지침서 종류 책들을 싫어한다. 뭐해라 저래라 이래야한다 류의 책들. 그리고 긍정강요 파이팅 마인드도 싫다. 아무리 말로 미화시켜봤자 인생 슬픈 일은 슬픈거고 힘든 일은 힘든거고 온전히 겪어내야 지나간다. 위로라는 것은... 뭔가 대단하고 거창한 말을 해주려고 할수록 망하는 종류 아닐까. 조언에 가까워질수록 더 망하게 되어있고.
'그래 우리 다같이 힘들고, 앞으로도 나아질지 계속 이럴지 알 수 없어. 그렇지만 나도 너도 지금을 이렇게 견뎌내고 있네!' 하며 서로의 눈을 마주보는 것,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위로는 이 정도로 적당하고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잘 모르는 남의 인생 위로한답시고 섣부른 희망이나 확신을 던지는 사람보다, 그냥 자기 인생얘기 하는 사람이 좋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 하는 자기 인생얘기가 좋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자신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자신이 행복할지 그런 것들을 스스로 잘 알며 존중해온 사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엔 '자기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마주하며 견뎌내어온 현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넉살은 래퍼나 예술쪽 진로를 가는 학생들에게 조언 해달라는 요청에 '~이러저러면 잘 될거고 희망이~' 같은 따뜻한 얘기가 아니라 "잘해야한다! 무조건 잘해야한다!"는 한마디를 던졌고, 그정도는 딱히 현실적이라 말할 정도의 냉정한 말도 아니란듯이 얘기했다. 현실은 훨씬 더 냉정하다는 걸 아니까.
나는 따뜻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들은 마음에 잘 담지 않는 편이다. 따뜻한 말로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 마음만 고맙게 받는다. 그런 말들은 조언과 위로로 삼기에 달달하고 마음이 편한만큼, 다른 현실앞에선 쉽게 부서질 종류이기도 하다는 걸 아니까. 듣는 순간에야 힘이 나겠지만 그 힘은 현실을 살아나가야 할 힘과는 조금 다른 종류였다. '잘될 수 있다'는 희망은 어디까지나 너도나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한 이야기일 뿐이어서. 미래를 생각할 때 막막하고 두려운 건 예측불가능성 때문인건데, 잘 되리라는 희망 역시 당장 가까워보이지만 예측의 종류일 뿐이어서 막상 현실적인 절망 몇 번에 무너지기 쉽다. 하지만 뼈저려도 진짜배기 현재와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몇 번의 절망 속에서도 계속 기억하고 우려먹을 수 있다. 그리고 차가울지언정 현실 얘기는 '너와 내가 같은 세상에 속해있구나' 싶은, 앞에서 말했던 생의 어떠한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그 역시 길고 깊게 우려먹을 수 있는 힘이 된다. 진짜 앞으로 희망이 있든 없든간에, 그냥 내가 발딛고 있는 이 세상 위에 너도 있어 공유하는 감정. '작은 것들의 신' 가사에서처럼,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건 중요치 않아 열심히 사는 너와 난 하나'라는 그 느낌인거니까.
# 밥값을 해
사실 요즘 제일 많이 듣는건 'organ'이지만 넉살, 하면 내 마음속에 더 먼저 떠오르는 곡은 '밥값' 이다.
'돈이 없을 땐 하나님 손자라도 일해야지 고픈 배는 채워야지 않겠어
엄마 왈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 이것이야말로 삶의 성경 배워야지 않겠어'
일단 도입부부터 가사 표현력에 크으 하며 들었고. '내가 지던 이기던 차가운 문고리만 넘어서면 항상 차려져 있을 그 밥상의 값은 얼마' 라는 부분이나 '내가 지던 이기던 신경쓰지 않는 세상과 매일 아침 마주하는 그 밥상의 값은 얼마' 이런 부분에서의 심정이 너무 공감가서 거의 내가 그 밥상 앞에 앉아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원래 무슨 이야기든 그 해석은 각자 자기의 삶에 맞춰져 들어가는 것이고... 내게 이 곡은 당장 먹고 살만한 돈을 벌어야지, 이런 느낌보다는 '떳떳한 생존'에 대한 이야기로 느꼈다.
'비록 돈이 없이 하고픈 일만을 하더라도
돈 때문에 하고픈 일을 못하더라도 밥값 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해 밥값을 해'
굶으면 죽게된다는 점에서 '밥값'이라는 걸 최소한 나 자신을 생존하게 할 수 있는 돈 값어치로 본다면... 내가 밥값을 하고 있는가, 이 문제는 결국 매일 '나 자신을 내가 살게 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인 것 같다.
나는 온전히 내가 번 것으로만 살아가지 않는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고 알든 알지 못하든. 당연히 거기엔 어릴 때부터 받아온 엄마의 밥상, 친척에게 받은 용돈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들도 있고, 밥상과 함께 눈에 보이진 않지만 사랑이나 믿음과 같은 정신적으로 받은 힘들도 많다. 그리고 받아온 많은 것들이 당연한 줄 알았던건 어릴 때였고, 받는 것이 마음 편할 때보다 불편할 때가 더 많은 어른이 된 현재, 나는 얼만큼 스스로 내 존재의 가치를 다하고 있는가. 사실 그런 면에서 생존에 떳떳할 수 있다면, 엄마가 해준 밥도 달게 먹을 수 있을만큼 내 밥값을 하고 있는 것이고... 떳떳할 수 없다면 내가 번 돈으로 사먹는 밥조차 잘 넘어가지 않는 것 그게 인생이니까.
내가 이기든 지든 세상은 신경쓰지 않지만 엄마의 밥상은 항상 차려져있다는 가사처럼, 나를 살게하는 것은 내 승패와 상관없이 늘 내곁에 있던 엄마를 포함한 사람들이었다. 돈 버는 것보다 하고픈 일을 택했든 아니면 하고픈 일 대신 돈버는 일을 택했든간에 열심히 살아야할 이유는, 그렇게 나를 살게하는 것들 때문이다. 그리고 진짜 내 행복을 위해서다. 더이상은, 받는 것에 천진난만하게 행복해할 수 있던 아이로 살 수 없어졌으니까.
# 꿈을 꽤 비싼 값에 샀어
사실 넉살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원래 유명하고 남들이 다 좋아하는 곡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곡이름 대면서 '나는 이런 것들까지 안다' 다른 티내고 싶긴한데ㅋㅋㅋㅋㅋㅋ 남들이 다 좋아하는 곡들이 정말 좋고 그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거다. 코드쿤스트와 함께한 이 '향수'란 곡도 organ 만큼 유명하고 사랑받는데, 나 역시 매일 듣고 있는 곡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PkRQdaluG6Q
특히 음원보다 이 라이브영상을 일부러 자주 찾는데, 여기서 딱 시작할 때 넉살이 직접 '호호호호' '하하하하' 추임새 넣는 그게 너무 좋아서ㅋㅋㅋ헤헷 진짜 좋아. 라이브라 조금이라도 더 공연보는 느낌에 가깝기도 하고.
'내 맥박이 뛸 때마다 사람들이 향에 취해 내 혈관 그 안쪽에서부터 냄새가 진해
자 나눠줄게 날 안아봐 5년전만해도 손사래치던 그 애가 바로 나야 나'
이 곡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유명한 소설이자 영화화되기도 한 '향수'에 배경을 둔 가사인데 어쩜 이렇게 '그려지듯 생생하게' 썼는지 들을 때마다 마음까지 쏙쏙 박혀들어오는 가사에 감탄한다. 넉살 특유의 랩투(말투처럼)도 너무 좋아함. 실제 소설이 그렇듯 이 곡 가사에서 허무하고 씁쓸한 느낌이 묻어있지만, 역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사랑하는 곡이다. 넉살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향에 취해있는 사람들이 들었으면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분명히 모든 결과에는 과정이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눈에 드러날만큼의 변화는, 서서히 해가 뜨며 어둠이 물러난 느낌보다는 언제 깜깜하던 적이 있기라도 했냐는듯, 처음부터 그랬다는듯 한순간에 밝아져있고 자연스럽다. 그루누이가 향을 얻고나서는 살인죄로 단두대에 올랐는데도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괴물처럼 기피대상이던 한 때가 믿겨지지 않듯이.
극적인 변화는 달콤한만큼 허무하다. 향이 있기 전부터 나는 계속 존재해왔는데, 향이 생기고 나서야 나를 알아봐주니까. 향에 취한건지 진짜 나를 보는건지. 물론 향을 얻어낸 것도 지금의 향나는 모습도 나이니까, 결과적으로 나에 대한 환호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건 우리가 본능적으로 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좀 다르다. 향이 없어도 받을 수 있는, 어느날 향과 함께 사라질까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 향이 나기 전부터 나를 봐주던 사람들.
'가끔은 궁금해 우리가 원래 향기로웠는지 저 벌떼가 떠나면 다시 외로워질지'
향이 난다고 해서 사람들과 함께 자기 자신마저 향에 취해 향이 나지않던 한때를 잊어버리면, 더 소중히 해야할 그 무조건적인 사랑도 함께 잊을 수 있다. 넉살의 쇼미더머니 결승전 무대 '막이 내려도'는 그래서 엄청 인상깊었다. 보통 화려하게 꾸미고 싶어할 마지막 무대를, 피쳐링도 없이 혼자 무대에 서서 고마운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하는 듯했던, 그래서 승패와 상관없이 넉살이 쇼미더머니를 성공적으로 끝냈구나 느꼈던 무대.
향수 가사에서 '꿈을 비싼 값에 샀다'고 말하듯 원래 없었던 향을 얻기까지는 대가를 치른다. 그루누이야 여자들의 목숨을 빼앗았으니 향을 얻다가 진짜 괴물이 된 셈이지만... 우리 모두 그렇게 극단적이거나 악의적이지 않더라도, 현재 나아가고 또 나아져가고 있다면 나자신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피 땀 눈물도 치르고 있는거라 생각한다. 세상은 원래 누군가 얻고 있으면 누군가 잃는 방식으로 돌아가니까. 넉살도 지금에 오기까지 쇼미더머니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든 상처든 시간이든 감당해온 수많은 것들이 있었을거고.
내 꿈도 비싼 값에 샀다. 물론 앞으로 의사로서 하고픈 일들 생각하면 아직 꿈의 반도 이루지 못한 상태이지만, 의사라는 직업에 닿기까지도 치른 대가들은 많다. 늘 지지해주고 믿어와준 부모님께 감사할 부분들은 물론이고. 씁쓸하지만 나의 10대 20대, 흔히들 청춘이라고 부르는데 시험과 공부 때문에 하고싶은 많은 것들을 참고 지내온 시간.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것도 내뜻이고 그래서 지금의 모습엔 만족하지만 아쉬운 건 별개로 또 아쉬운거다. 오랜 시간동안 tv로만 홍대거리, 밴드공연을 즐기는 사람들을 어찌나 부러워했던지... 그래서 의사면허를 따고 29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자유로워진 후 그동안 쌓여온 한풀이를 하듯이 미친듯이 공연보러 다녔다. 남들이 헉 할 정도로ㅋㅋ 잊지 않으려고 블로그에 기록도 열심히 남기며 1년간 50번도 넘는 공연을 봤으니... 제대로 한풀이하며 쌓여왔던 아쉬움을 많이 풀었다.
향을 얻었으면 향에 취하고 즐기는 게 멋지고 어울린다. 나는 초심을 지켜라 어쩌구 한다고 향이 나기전의 내모습을 되새기며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바뀐 현재를 두고도 계속 과거에 머무르는 거니까. 초심을 지킨다는 건 '과거의 내 모습' 말고 '과정'을 되새기며 잊지 않는거 아닌가. 내가 그 향을 얻는데까지 치른 대가와 향이 나기 전부터 받아온 사랑들. 남들 눈엔 '갑자기'처럼 보이지만 이 향은 결코 갑자기도 대가없이도 얻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 놔둬 넉살의 ORGAN. https://www.youtube.com/watch?v=Yy-_IqSeTvY
넉살의 음악에 위로받고 공감한다는 것은, 그만큼 당연해야 할 것들이 당연할 수 없는 삶을 살고있는 현실의 반증이라고도 생각한다. 내가 맘껏 살고 싶은대로 살고 있었다면 organ 같은 가사에 끌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되새길 이유가 없을테니까. '팔지않아'에서 외치듯 우린 우리 자신일 때 더욱 빛나고, 우리의 영혼은 절대 싸구려로 팔아선 안되는데.. 이런 '당연해야 할 것들'을 바쁘게 살아가다보면 잊기도 한다.
20대 초반에만 해도 나는 마음이 정말 원하는 것보다는 돈을 쫓아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내면적인 가치를 모르고 탐욕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로 나와 다양한 사람들을 알게되며,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것'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조차 누리고 있는 복이자 권력임을 깨달았다. '하고싶은 일' 과 '돈이 되는 일'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 그 중에 하나를 택하는 일이 '욕심을 부릴 것이냐 아니냐' 정도가 아니라 '생존' 자체가 걸린 경우들도 많다는 것을. '선택'이라고 하니 말로야 자유로워 보이는거지, 내 마음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할 여유조차 없이 생존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선택'들도 있다는 것을. 내가 생존하기 위한 수단과 내가 좋아하는 일이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내 마음을 위한 일, 내가 원하는 나 자신을 지켜내는 일도 당연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애써야 되는 일이다. 자꾸 생각해야 하는 일이다. 진정성이라느니 최선이라느니 그런 내적 가치들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보상해주지 않는 세상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내가 organ을 자기최면 걸듯이 반복해서 듣고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넉살은 머리로 하는 생각보다 느끼는 것을 더 '살아있는 상태'로 느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역시 내 마음이 원하는대로 끌리는대로 살고 싶지만,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선택할 때 현실적 측면을 계산하는 머리와 충돌한다. 그래서 내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 가사를 자꾸 곱씹는 것같다.
'생각할 수 있기에 살아있는가, 아니 느낄 수 있기에 나는 살아있는 자.'
'내가 느낀 것을 받아적게 놔둬 스며들게 놔둬
여전히 빡센 삶에 친구들 괜찮아 더 쓰라리게 놔둬'
나는 지금 얼마나 내 마음, 내 느낌을 존중하며 살고 있나. 그리고 '느낄 여유'를 주고 있나.
"괜찮아, 더 쓰라리게 놔둬!" 이부분을 특히 좋아하는데- 요즘은 '마땅히 아플 이유있는 시간'조차 사치로 여겨지기도 하니까. 방황하거나 슬럼프를 겪는 시간도, 결코 쓸데없는 시간이 아니고 길을 찾기 위해 거쳐야할 과정인데 표면적으로 뭔가 되어가는 게 보이질 않으니 그 가치도 인정받기 어렵다. 잠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거기서 무언가를 얻기까지를 기다려주어야 하는데, 사람들과 세상은 냉정하고 뭐하고 있냐, 현실을 모르네 등등 덜자란 어른 취급하기도 하고. 괜찮다, 좀더 아파하고 있어도 괜찮고 헤매고 있어도 괜찮다- 그런 느낌이어서 이 부분을 너무 좋아한다. 좀 놔둬 쫌!!
# 아이 오리진스
그리고 'Organ' 이 곡 들을 때엔 최근에 인터뷰에서 넉살이 추천한 영화 중 하나인 '아이 오리진스'가 겹쳐지기도 한다.
사실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분자생물학 연구원인 이안 그레이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공대생에 의학전공.. 거기다가 진화학을 정말 재미있게 들었었다.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눈으로 확인되는 것에서 믿음이 생기고 희열을 느끼는. 하지만, 보이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더 믿고 싶은것이 진심이고 실은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마음으로 느끼는 것들을 더 따라가며 살고 있고, 사랑이나 믿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내 행복을 더 좌지우지한다. 인연이라는 말도 그렇고 기적이라는 말도 그렇고 '있다고 믿고 싶은' 종류들. 그것은 결국 '실제로 믿을만한 증거' 없이도 믿고싶은 내 마음에 의해 완성된다. 어떤 현상이든 해석은 우리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관계를 인연이라고 믿고 싶다면 그건 인연이 되고, 어떤 우연한 결과를 기적으로 믿고 싶다면 기적이 된다. 그리고 누군가의 그런 스토리가 또 다른 인생에 '그런 게 있구나'라는 희망으로 작용한다. 이 영화 마지막에 살로미나를 통해 얻은 실험적 결과 일치도가 높게 나왔다면 '진짜 믿는 일이 가지는 가치'를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믿을 근거가 확실히 마련된 것을 믿는 일은 누구나 쉽다. 설명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때에 그 믿음은 설명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이안 그레이가 직접 수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가설임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살로미나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울자 바로 소피를 떠올린 것처럼. 나는 넉살의 organ과 함께 이 영화로부터 힘을 얻었다. 끝까지 과학적인 수치로 설명되진 않을 뿐이지만, 그래서 내 진심도 튀어오르는 것이니까, 그 엔딩이 내가 믿고 싶은대로인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 black ink
넉살이 한때 시인을 꿈꿨었다고 했는데,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는 시인 넉살의 팬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랩을 하고있는 넉살의 팬이 되어있듯이. 시이든 랩이든, 혹은 그림이든 노래이든... 결국 이야기가 존재해야 하고, 그것을 듣고 알아봐주는 사람도 있어야한다. 아티스트에게 실력이 필요한 건, 실력 자체부터도 예술의 수준이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자기 이야기를 듣게 하기 위해서' 아닐까.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를 잘해야, 랩하는 사람은 랩을 잘해야 사람들이 일단 들을테니까. 그렇게 실력부터 갖춰야 들으려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때부턴 어떤 이야기가 더 오래 살아남느냐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한 아티스트. 우리나라에 랩 잘하는 래퍼는 넉살 한 명만이 아니지만, 넉살의 가사는 넉살에게서만 나오고 나는 그의 이야기가 좋아서 또 무슨 이야기를 할지 귀기울인다. 넉살의 랩들 중에 내가 특히 좋아하는 부분들을 좀 모아보자면...
moment of silence 밤과 낮의 사이 가장 조용한 시간에 나를 찾네
휘두르는 말들은 배트를 닮아 너 자신을 멀리 장외로 차네
남들의 말에 귀를 주지마 너의 마음은 훨씬 강해
너의 목소리가 너의 AED 그래서 나의 랩도 심장에 가깝지 #팔지않아
함부로 동정하지 않아 누군가를 감히 용서하지 않아
생각보다 굳건히 지켜온 너 자신은 누군가의 pride
자리는 작을 수 있지만 널 여기까지 잘 몰고 왔어 눈물을 닦아
혼자서 울지 않아본 이는 이걸 몰라 그저 아파
청춘이 아니라도 믿는 신이 없더라도
두 손 모아 바래본 이들은 역시 나와 같아 #작은 것들의 신
쉬워 숨을 쉬는 건 아주 쉬워
살아남긴 쉽고 살아가는 것은 두려워
내 이름은 명사지만 그 뜻은 동사겠지
펜을 전부 쓸 때까지 내 피는 흐르겠지
심장을 갓 지나온듯 따뜻해
내 입속을 지나 언어의 뜻이 바뀔 때
사각형의 책상에서 사각거리는 소리
젊은 날의 조각 내 흉상의 머리 얼굴 눈과 코 잠깐 입술은 지워둬
오로지 ink가 번지는대로 적어두자 내 젊은 날의 투자
소나기가 내리듯이 쏟아지는 글자
창밖은 벌써 빛을 들이고 하얀 것들은 더럽혀지고 검게 물들어
검은색 방울들 서로가 뒤엉켜
수많은 고민과 밤들은 오로지 널 널 위해서 #black ink
진짜는 무엇일까 거짓말을 안해도 real 하다고는 안하던데
포커페이스를 믿으니까 사실 손 안에 패는 상관없지 보다 더 진짜같아
진주같아 숨길수록 빛이 나네 화려한 화술들은 더욱 활활 타네
우린 그 불구경에 잊을거야 처음 질문을
그렇담 우리도 가진거야 가짜의 지분을
성공은 무엇일까 실패의 반대말이라곤 안하던데
그저 돈인가 무엇도 필요없는 알몸의 예술가들에게는 돈이 돈인가 그저 돌인가
위하는 가치가 달라 우린 그 잣대로 숫자와 글자가 싸우는 걸 자주 봐
타인에게 말해주긴 너무 쉬운 단어가
자신에게 한 질문에는 메아리도 안닿아 #Q
날 감싼 바다 난 어디든 갈 수 있는 갈퀴
세상이 그린 지표 fuck 차라리 잃을래 갈피
나의 즐거움을 버릴 수 없어 날 가르칠 수업은 없어
보이는 것만 쫓는 여긴 눈먼 자들의 도시
절대 보이지 않는 것이 눈먼 자들을 돕지 #눈먼 자들의 도시
내 미래를 왜 너가 정해 내 시간은 날 차분히 기다려줬어
필요하다면 난 귀를 자르고 내 손으로 날 그려 완성할래
이게 내 행복의 조건 시간은 각자의 것
행복으로 가는 길도 가지각색인 것을
난 기계가 아니고 피가 흐르는 인간이기에
내가 흘러가는 곳에 고일거야 #make it slow
세상도 나도 변했어
마치 선악과의 사과 맛을 본 듯이
작은 꿈을 꾸고 다시 잠에 들듯이
새로운 꿈을 꾸네 가능성에게 희망을 조금 꾸네
여기까지 빌린 부채가 크네
갚을 때가 된 것 같아 난 사랑을 내밀었지만
세상은 돈을 원해 그래 나도 그게 편해 #do it for
십자가는 서울을 무덤처럼 그려내는 피카소
이 예술적인 무덤은 어린 양의 피난소 이기에
이리떼로 자란 이들은 그냥 지나쳐 #올가미
넉살이 힙플라디오나 술취한 채 찍혀있는 영상들에선 장난기 많고 친근한 옆집오빠ㅋㅋㅋ 같은 느낌이 들다가도, 넉살이 랩으로 뱉어내는 이야기들에서만큼은 그의 음악만큼은 진지하게 대하게 된다.
음, 특히 '블랙잉크'라는 곡은 넉살 파트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가사 다 좋다. 곡의 분위기도. 아티스트에게 작품이라는 건 영원히 그의 이름으로 남겨질 것의 생산이다. 사람은 죽어도 작품은 몇십년 몇백년이고 남아 한때 그 사람의 존재를 영구적으로 새기게 할 수도 있고. 그건 한편으론 멋지고 대단한 일이면서, 한편으론 그만큼 부담스러운 일이지 않을까. 사람은 계속 변해가는 존재니까, 한 때 믿어온 것들이 어느날 사라지기도 하고, 예전에 솔직하게 썼던 글이 시간이 지나 내 생각이 변하면 거짓말처럼 되어버리기도 한다. 곡 하나하나 작품 하나하나가 나오면 감상하는 일이란 참 쉬운데. 어쩌면 아티스트들은 내가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길고 깊은 고민을 거쳐서, 자신보다도 더 오래 존재할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 더 자유로울 수 있어
'필라멘트' 이 곡은 친구에게 힘이 될거라고 직접 가사를 써서 주기도 했다.
가만히 바라봐 나의 작은 방을 홀로 밝히는 Light
Too many ups and down
언젠가 빛을 다하고 끊어질까
어쩌면 어둠이 더 편할 수 있어
오히려 그게 더 자유로울 수 있어
http://tv.naver.com/v/1992852?query=넉살+필라멘트&plClips=false:1992852:1992663:2022571:2066747:2012387
무대영상도 너무 멋졌었다. 가사 하나하나 또렷하게 전달하는 넉살과 등뒤로 불빛들.
어둠은 누구나 겪고 싶어하지 않지만 누구나 겪게 된다.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존재한다는 것은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겨우 30년을 살아내고는, 겪었던 어둠을 필라멘트가 끊어져 온통 깜깜했던 상황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 상상도 못해본 어둠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두웠던 시간들이 힘겨웠던 건 사실이고, 지금 돌아보면 안타까운 건 좀더 그 시간동안 자유로울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빛 속에 있는동안 '언제 이 필라멘트가 끊어지고 어두워질지' 불안해하며 살았다면 어둠이 찾아온 동안에는 그 불안을 좀 내려놓고 쉬어도 되었는데 또다른 불안을 끌어와 자유롭지 못했다. 이 어둠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불안하고, 다른 친구들은 어딘가로 나아가는데 내 세상 혼자 이렇게 어둠속에 남겨질까봐 불안하니까. 어차피 빛과 어둠은 번갈아가며 오는 것인데 빛속에선 빛을 잃을까봐, 어둠속에선 어둠이 지속될까봐 늘 마음을 편하게 놓아주지 못했던 것. 빛속에선 올 어둠을 생각하고 어둠속에선 안올 빛을 생각하고. 빛과 어둠 어느 곳에도 내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지 못해서였다. 빛이든 어둠이든 그때 그때의 상황만 인정하고 집중하면 마음이 좀더 자유로웠을텐데, 늘 동시에 떠올리며 애매한 회색지대에 있었는지도.
어둠이 더 편할 수도 있다며 어둠이란 걸 결코 겪을만한 것이라고 미화하거나 긍정으로 합리화하고 싶진 않다. 내가 살면서 느낀 건, 고생은 굳이 사서할 필요 없고, 상처는 그냥 안받을 수 있는 게 가장 낫다 이니까. 물론 고생과 상처들이 잘 거쳐내면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건 사실이고, 그러니 잘 견뎌내어 훗날 그 고생을 미화하게 될만큼의 성장을 하는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아픈 건 아픈거다. 어차피 그런 것들을 살아가며 한번도 겪지 않은 건 불가능하고, 아마 몇 번이고 여러번 닥쳐올거고, 최대한 피해서 사는 게 낫다.
이 '필라멘트'라는 곡을 들으며 얻는 힘은, 어둠 자체를 긍정하자기보단 어차피 불가피한 것이니 이왕이면 더 편한 마음으로 겪자고 다짐하는 마음에서다. 빛은 어둠속에서 잘 살아내다보면 때가 되어 오는거지, 어둠속에서 나 자신을 괴롭힌다고 오는 게 아니니까.
인생이 얼마나 초라하거나 화려할지, 그런 표면적으로 계산되는 환경적 행복은 태어날 때부터 내 의지밖에서 일부 결정되고 살아가면서도 내 의지밖에서 많이 결정된다. 하지만 내가 내 인생을 얼마나 사랑할지, 내면적인 행복은 세상도 타인도 방해할 수 없는 내 의지영역에 있다. 내 마음이다. 예를 들면, 이런 앨범을 들으며 얼마나 내 위로를 찾아내고 내 힘으로 삼을 것인지, 그것도 내게 맡겨진 몫이다. 내가 넉살을 좋아하는 정도는, 나 스스로의 위로에 성공한 만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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