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시씹기/시

속리산에서

    속리산에서


                                           - 나희덕 -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에서 밥을 끓여 먹고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다시씹기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0) 2016.09.21
나 서른이 되면  (0) 2016.09.13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명상  (1) 2016.09.02
빵, 외투, 심장  (1) 2016.09.02
비극  (0) 2016.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