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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씹기/시

빵, 외투, 심장

빵, 외투, 심장

 

- 심보선 -

 

 


공원 벤치 위에 남자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상냥해 보이지는 않는다

악마와의 마지막 거래라도 궁리한다는 듯

눈에는 붉은 기운이 완연하다

머리 위로 하늘의 푸름을 완연히 부정하며

먹구름 떼가 지나간다

그들의 어두운 외투 안에는

어두운 빵과 어두운 심장이 담겨 있다

빵과 심장은 무엇이 닮았는가

오래될수록 까맣고 딱딱해진다는 점

그러나 누가 아는가

그들에게도 재미나는 사연 하나쯤 있을지

이를테면 딸아이가 연루된 주먹다짐이나

소풍에 얽힌 유쾌한 에피소드 같은

비둘기들은 주변을 맴돌며

그들의 외투에서 빵가루처럼 떨어지는

후회나 낙심 따위를 노리고 있다

비둘기들이 비유를 알 리 없지 않은가

그들은 입도 벙긋 않고

흑백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자세로 앉아 있다

눈앞의 허공에 The End라는 자막이 둥실

떠올라도 이상하지 않겠다

먹구름은 속도가 빠르다

저녁 배급을 기다리는 실업자들처럼

붉은 얼굴로 서편 하늘에 우르르 몰려간다

그들은 닮았지만 서로 말을 걸지 않는다

각자 자기만의 궁리에 몰두해 있다

그러나 누가 아는가

밤이 오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어깨를 두르고 술잔을 주고받을지

그러나 지금은 어두운 침묵의 시간

난해한 미래의 독법을 궁리하는 시간

비둘기들은 아직도 비유를 모르고

포기를 몰라 끝도 없이 주변을 맴돈다

그들이 앉은 벤치로부터 공원 전체로

미지의 그들이 번져가고 있다

말 그대로 미지의 그늘이다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둥실

떠 있는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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