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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씹기/시

기본

기본

 

- 임솔아 -

 

 

 

흰 티셔츠를 찾아다녔다.
내일의 약속을 위해서

옷가게에 들어갔다. 흰 티셔츠가 흰 티셔츠끼리
모여 있었다. 가슴에는 주머니가 없거나 있었다.

옆가게에도 들어갔다. 흰 티셔츠가 다른 티셔츠와
무더기로 쌓여 구겨져 있었다.
구겨진 옷은 조금 더 저렴했다.

얼굴 없는
마네킹은 어떤 옷이든 잘 어울렸다. 내 얼굴에
잘 어울리는 티셔츠를 나는 찾아다녔다.
기본 티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죠, 점원이

말했다. 흰 티셔츠를 찾아다니다 집에 있는
흰 티셔츠가 기억났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집으로 돌아와

옷장 서랍을 열어보았다.
흰 것들을 모두 꺼내보았다.
흰 티셔츠는 저마다 얼룩을 갖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얼룩에다 치약을 묻혀
비볐다. 지워지고 있는 얼룩을 이목구비가 허옇게 바래가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오래 지켜보았다.

지워지는 얼룩은
지워졌고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은
가장 자주 입어 가장 쉽게 얼룩이 졌다.

탈수된 티셔츠를 세탁기에서 꺼내어
탁탁 털었다. 창문가에 걸어두었다. 티셔츠가
펄럭였다 말라가면서 옷은 더 환해졌다. 내 방에는
얼굴 없는 빨래들의 환한 냄새가 퍼져갔다.
내일은 약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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