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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씹기/시

대각선의 종족

대각선의 종족


- 나희덕 -




대각선의 종족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지


높은 담에서 뛰어내리는 고양이는

대각선을 날렵하게 완성하고

급브레이크 자국은

휘어진 대각선이 있음을 알게 하네

벽에 기대놓은 사다리는

대각선이 잠시 쉬는 것처럼 보이고

구릉과 산비탈은

조금씩 완만한 대각선이 되어가는 중이네

사람의 벌거벗은 몸에도

산맥과 구릉, 깊은 골짜기들이 있지

대각선으로 뻗어올린 다리와

수직을 지탱한 다리의 각도는 위태롭고

머리를 감싸쥔 팔과

공중으로 뻗은 팔 사이에는

빛이 대각선으로 쏟아져내리고 있네

새들은 나뭇가지 사이로

빠른 빗금을 치며 날아오르고

지붕의 기울기에 따라

빗물은 다른 속도로 흘러내리네

오늘은 바람이 꽤 강하게 부는 것 같군


바다로 불려가는 갈대들을 봐

무언가 잃지 않고는 대각선이 될 수 없지

낙엽들은 나무를 잃고

나는 오래된 계곡 하나를 잃었지만

그렇다 해도 기억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진 않겠어


다만 비스듬히, 비스듬히, 말하는 법을 배울 거야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과

길게 성호를 긋고 사라지는 별똥별에 대하여

수많은 대각선의 날들, 날개들, 그림자들, 핏자국들에 대하여

대각선의 종족이 남긴 유언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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