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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여 - 해피엔딩 없이 완성하는 사랑

 

해피엔딩 없이 사랑을 완성하는 영화, 남과 여

 

 

 나는 사실 이성간의 사랑을 다루는 영화는 잘 보지 않는 편이다. 나름 굉장히 감성적인 편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예외인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처럼 남들 다 울었다는 영화에도 그 사랑에 대한 감정몰입이 잘 안되었었고, 드라마에서조차 남들이 빠져드는 연애장면과 말투에서 유독 오글거림을 느끼는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깊이에는 잘 몰입하지 못하는 편이라고 여겼다. (로맨틱코미디는 재미로 가볍게 보곤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어떤 영화보다도 몰입해서 본 것 같다.

 전도연과 공유 주연의 '남과 여'. 사실 영화예고편을 보았을 때도 딱히 봐야지 하는 생각이 안들어서 지나쳤던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공유의 인터뷰를 담은 기사를 읽고 나서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사랑의 밑바닥을 경험해본 것 같다, 사랑이 싫어졌다'는 내용과, 사랑을 다루는데에 있어서 '판타지 가득한 영화이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작품'이라는 설명 때문에 끌렸다. 적어도 내게 '에이 뭐야 역시 또 그냥 예쁜 사랑 타령이네' 하는 실망감은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보게 된 이 영화는 다음 날까지도 여운이 계속 되고 있다. 내겐 이런 영화였다.

 

 1. '남과 여' 

 

 사실 처음에 이 영화에 끌리지 않았던 이유가 제목 때문이기도 했었다.

 그냥 '남과 여' ? 영어로도 그냥 a man and a woman.

 사랑 얘기를 다룬다는 영화에 대충 지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 단순한 제목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본 후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지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제목으로 다가왔다.

 이 영화에서의 사랑은 현실적으로는 응원받기 힘든, 어쩌면 영화를 보며 욕할 사람들도 많을 환경에 있다. 불륜. 심지어 사별한 것조차 아닌, 아들과 남편이 있는 '엄마'인 여자와 딸과 아내가 있는 '남편'인 남자의 사랑. 게다가 여자의 아들과 남자의 아내, 딸은 모두 아픈 사람들이다. 그래서 상민(전도연)과 기홍(공유)단순히 가족구성원으로뿐만이 아니라 보호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지쳐있기도 하다. 분명 한 때 사랑해서 결혼했고 지금도 사랑하고는 있겠지만, '자신이 없으면 안될' 아들 옆에 늘 붙어있는 상민과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아내과 그걸 지켜보며 또 영향을 받고있는 딸 둘 다 신경써야하는 기홍은 이미 여자, 남자로의 자신을 잊게된지 오래였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핀란드에서 만난다. 눈이 많이 오고 추운 핀란드라는 외국환경, 그 안에서 한국인이라는 것과 아이를 데리고 온 공통된 위치에서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유대감, 그리고 그들 내면에서 눌려온 욕구. 여러가지가 상호작용해서 서로 강렬한 감정에 끌려들어간다. 이 만남에서 중요한건 상민이 여자로, 기홍이 남자로의 자신을 다시 찾게 된다는 . 사실 불륜이라는 관계를 감안한다면 그간 있었던 영화제목들을 떠올려볼 때 '위험한'이라든지 '금지된' 등의 강렬한 사랑을 수식할 말이나 아예 '불륜'이라는 점을 드러낼만한, 눈길을 확 끄는 제목을 만들 수도 있을법하다. 하지만 단순히 '남과 여'라고 제목이 붙여짐으로써 그저 '남자'와 '여자'간의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다. 

 상민과 기홍이 빠져드는 강렬한 사랑의 감정은, 서로를 향해 있다기보단 '다시 사랑하고 있는 여자와 남자로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서 서로에 대해 왜 그렇게까지 사랑하는지에 대한 설명 포인트는 딱히 찾을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흐르는데, 그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어쩌면 상민에게 굳이 '기홍'이 아니었어도 그 상황에 어떤 남자가, 마찬가지로 기홍에게 굳이  '상민'이 아니었어도 어떤 여자가 그 상황에 나타나줌으로써 사랑은 시작되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 눈엔 영화 초반에서부터 그들이, 사랑하는 일이 다시 필요한 '한 여자'와 '한 남자'로 보였다. 

  

 

2.  "난 말야. 사는 게 왜 이렇게 애매한지 모르겠다"

 

 기홍은 영화 내내 애매한 대답을 하는 성격으로 나온다. 그런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고 이런 식.

후에 마치 우연인 것처럼 기홍이 상민을 찾아왔을 때 상민이 '우연 아니죠?'라고 물었을 때도 '반반..' 이라고 대답하고,

나중에 하던 일이 다 마무리되면 다시 핀란드로 가냐고 물었을 때도 '그럴 수 있지만 그럴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라고 대답한다. 물론 이 때는 좀 더 솔직해져있는 모습이긴 하다. 상민씨 때문에 못갈 것 같다고 덧붙이니까. 

 처음엔 상민보다 더 적극적으로 애정표현을 하고 다가가면서, 막상 영화 결말에 더 뒷걸음을 치고 있는 것도 기홍이다. 그런데 그의 삶을 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영화속에 그들이 어떻게 결혼했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자세히 보여주는 부분은 없지만 기홍의 아내가 기홍에게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느꼈다.

 내가 당신을 이해한적이 있었나, 얼마나 답답했을까, 정말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기홍의 아내는 정신과약을 먹으면서도 불안정해서 술을 마시고 위험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충동적이 되기도 하고 쓰러져서 입원하는 일이 처음이 아닐만큼, 안심하고 지켜보기에 불안한 존재다. 즉 기홍에게 있어서 아내와 사는 일이란 평범한 남편처럼 '이해받고 사랑받기를' 요구할 여유가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아내를 이해해주고 받아주고 돌보아야하는 보호자와 같은 역할에 더 치중해야 했을 테니까. 심지어 그런 불안정한 엄마를 목격하는 딸도 영향을 받는다. 어쩌면 그의 삶은 오랫동안 '남자'인지 '남편'인지 '아빠'인지 '보호자'인지 애매함 속에서 이어져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매함에서 딱히 벗어날 수는 없는, 그저 현실에서의 그 역할을 해야하는 삶.

 그런 것을 생각해볼 때 사실 상민에게 기홍이 보여주는 태도들은 꽤나 적극적인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상민의 직장을 알아내서 찾아간 것부터 시작해서, 계속 먼저 연락하고, 출장까지 따라가고, 시도때도 없이 그녀를 만나러 찾아가고.오랜 친구인 세나가 그의 상황에 변화가 있음을 눈치챌 정도로 그는 사랑하며 남자로 돌아가고 있었다.

 

 

3.  만날 때마다 여행같은 사랑

 

 

 이건 이 영화에서 내가 제일 행복하게 본 장면이다. 처음엔 기홍이 부산까지 출장가는데 데려다준다고 해도 거절하던 상민이, 기차역까지 배웅받고 올라타서는 먼저 기홍에게 전화를 걸고, 어느새 옆자리에 타는 기홍을 보며 미소짓는다. 여느 연인들처럼 같이 기차내 음식도 먹고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설렘이 전해지는 이 부분에서는, 저 기차가 도착하지 않기를 바랐을 마음까지 전해진다. 마치 현실 속에서 여행이 주는 일탈처럼.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져있는 시간이다.

 참 태평해. 아무고민도 없는 사람처럼-

 이렇게 웃으며 말하는 상민에게서, 불륜이라는 상황으로 인해 주저하고 있는 자기 마음을 두드리는 기홍의 적극적인 모습을 통해 점점 자기 진심으로 더 다가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술마시고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했다는 기홍에게 먼저 찾아갈만큼의 적극적인 행동까지 하게 되고.

 뒤에 상민의 아들과 함께 바다에 가게 되었을 때 '우린 만날 때마다 여행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대사가 있는데, 이 기차안에서의 모습이 특히 말해주는 부분인 것 같다. 여행이라는 것은 보통 '일상'이기보다는 '일상 속에서 마음먹고 떠나는 일'이다. 그래서 '일탈'의 기쁨으로 여행을 다니는 사람도 있고 '낯선 곳'과 '낯선 경험'에 대한 즐거움으로 가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이들의 사랑이 바로 그런 것이다. 지쳐있었던 엄마 상민과 아빠 기홍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탈이자 다시 '여자'와 '남자'로 돌아가는 낯선 경험. 그래서 어찌보면 이 사랑의 결말은 현실로의 복귀일 수밖에 없다. 여행이라는 게 그렇듯이. 여행의 즐거움은 일상과 일상 사이에 하나의 일탈로 끼어있음으로써 더욱 반짝반짝 빛나는, 소중한 시간으로의 가치를 다하기 때문이다.

 "돌아가지 말까요?"

 "그래요"

 "농담 아닌데"

 "우리 정말 큰일이다.."

 결국 기홍이 아내와 딸과 함께 하고 있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으로 끝을 맺어서 이 영화가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하지만, 정말 돌아가지 않고 그들의 사랑을 위한 삶을 새로 시작했다면 그건 과연 해피엔딩이었을까.

 

 

4.  해피엔딩 대신 확실한 감정의 잔재로 사랑을 완성하는 영화

 

"제일 좋을 때 끝내자."

나중에 남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용감한 고백까지 하면서 기홍을 쫓아가는건 상민이지만, 먼저 이별을 통보했던 쪽도 상민이었다. 더 힘들어지기 전에 그만하자고, 우리가 뭘 할 수 있느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고 이야기하는 모습 속에서, 본인 스스로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래서 마지막에 상민이 아들 종화와 통화하며 사랑한다고 말하며 우는 장면이 가슴아팠다. 엄마와 떨어져 예전처럼 cf 노래를 부르고 있는 미숙한 아들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고, 가족과 함께있는 기홍을 보며 차마 앞에서 할 수 없어 홀로 삼켰던 말일 수도 있다. 상민을 발견하고 뛰어나가 차를 타고 따라가려고 차키를 꺼내는 찰나에 그런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딸의 모습에 멈추는 기홍의 모습도 안타까웠다.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속으로 둘이 다시 만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택시기사에게 몇시냐고 물어봤다가 시계를 찾아보려하니까 아니라며 '모르는게 낫다'는 말은 기홍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나누었던 이야기. 이 영화는 그렇게 '만나지지는 않지만' 기홍과 상민의 마음속에 사랑의 감정이 여전함을 확실히 보여주며 끝이 난다.


 이 영화를 보고난 후 여운이 오래도록 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해피엔딩이 아닌 찝찝함 때문이 아니다. 둘이 잘 이루어지는 결말 대신 이렇게 확실한 감정의 잔재로 사랑을 완성해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은 지키기 위험한 상황에서 더 완벽해보이곤 한다. 불륜이라 당연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수없이 방해받는다. 관계를 하다가도 깨어있는 아들 때문에 멈춘다거나, 만나려다가도 찾아온 남편 때문에 모른척 지나간다거나 하는 상황들 뿐만이 아니라 '죄책감'이라는 큰 요소가 끊임없이 주저하게 만들고 본의아닌 밀당이 되게끔 만든다. 결국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그들의 사랑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감정은 이 영화속에서 끝까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진다고 생각한다. 둘이 잘 이루어지는 결말도, 불륜이기에 깨끗이 맘을 접고 원래의 가족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결말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이 정도의 여운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