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에 씌다
- 나희덕 -
가만히 좀 있어봐, 하면서
그는 내 얼굴에서 거미줄을 떼어낸다
저녁에 옷을 갈아입다 보면
윗도리에도 거미줄이 한 웅큼 뭉쳐져 있다
낮은 허공에 걸려 있던 거미줄이
얼굴을 확 덮치던 그날부터
내 울음은 허공에 닿아 거미줄이 되었다
버둥거리며 거미줄을 떼어냈지만
내 얼굴에선 한없이 거미줄이 뽑혀나왔다
울음으로 질겨진 거미줄 위에서
때로는 흰 꽃잎을
때로는 부서진 나비 날개나 모기 다리를
건져 올리며 까맣게 늙어가는 동안
울음도 함께 늙어 말수가 줄어드는 것일까
나는 내 울음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둘러앉아 사람들은 말한다
가만히 좀 있어봐, 거미줄이 묻었어.
조금은 거미인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하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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