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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수업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中

바나나색우산 2016. 5. 25. 22:25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 쇼펜하우어

 

만족감이나 행복은 욕망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족감이나 행복감은 욕망이 채워지는 과정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것들은 욕망이 채워지는 순간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사라진 빈자리는 권태로 채워집니다. 이러한 권태는 한동안 지속되다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새로운 사물이 나타나서 우리가 그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될 때에야 없어집니다.

 

 

니체는 우리 인간에게는 자신의 힘을 고양시키고 강화하고 싶어하는 충동이 있다고 보면서 그것을 '힘에의 의지'라고 불렀습니다. 니체는 우리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단순히 안락하게 오래도록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무엇인가 위대한 것을 성취하면서 자신이 고양되었다고 느끼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과 싸우면서 스스로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일함을 추구하려는 자기의 성향과 투쟁하면서 자신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니체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힘을 추구하며 자신을 강화하고 고양시키려 하기 때문에 세계에서의 투쟁이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가 바로 이제까지 인류에게 내려져 있었던 저주였다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를 계속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지요.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입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그런 물음이 제기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삶을 재미있는 유희처럼 살아갈 때에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해소'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주목해주십시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어떤 이론적인 답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없고, 그런 물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으로만 해결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그런 물음은 그것 자체가 해소되어서 사라지는 방식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런 목표나 의미 없이 기쁨 속에서 파괴와 창조를 거듭하는 이 신을 니체는 디오니소스라고 부릅니다.

니체가 '초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렇게 파괴와 창조,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슬픔이 반복되는 이 세계를 웃으며 긍정하는 자이고, '춤추는 디오니소스처럼'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이러한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환희에 차 춤추는 자입니다.

 

 

운명애愛의 철학은 언뜻 보면 자유의지의 철학과 동일한 것 같지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런 철학은 힘든 운명을 하나의 기회로 승화시키려고 합니다.

니체가 말하는 운명애는 숙명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운명을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로 이용하고 승화시키라는 철학입니다.

 

 

니체는 거세라든가 근절과 같은 방법은 사실은 자신의 정념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의지가 약하고 퇴락한 자들이 자신의 정념과 싸울 때 본능적으로 택하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숭고한 사람으로 보기 쉽지만 니체는 사실 그러한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종교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인간을 성숙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니체는 종교적 성인들처럼 인간이 자신의 자기중심성과 호승심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자기중심성과 호승심을 긍정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와 부처가 내세우는 사해동포주의적인 가치는 인간들을 무기력한 수동성으로 몰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위대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모든 일에 회의를 품는 사람이다. 신념에 가득 찬 사람은 필연적으로 나약한 인간인 것이다.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가치와 무가치와 관련된 근본적인 모든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확신이란 감옥이다.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은 강한 힘의 특성이다.

 

니체는 어떤 독단적인 확신을 굳게 믿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인간은 의존적인 인간이며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이념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독단적인 이념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념이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습니다. 인간은 덧없이 생성 소멸하는 삶의 가운데에서 불안을 느끼기 때문에 어떤 이념에 의지하여 그러한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니체는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타고난 성질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하나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하면서 제 2의 본성을 덧붙이고 제 1의 본성 중 일부분을 변용하면서 자신의 성격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되는 사람'이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지배하면서 자신을 일정한 방향으로 길러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동은 자신의 본능적인 욕구에서 필연적으로 경쾌하게 따라 나오는 행동이고, 이 경우 사람들은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라고 외칩니다. 이렇게 볼 때 '자유로운 행동'의 진정한 의미는 칸트가 말했던 '도덕적인 의무에 따르는 행동'이 아니라 '본능적인 필연성과 하나가 된 행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