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 어쩔 수 없이, 불편한.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어 불편한, 곡성
보는 사람들마다 말이 많다고 해서 궁금해진 영화, 나홍진감독의 '곡성'을 보고 왔다.
솔직히 내가 영화를 자주 보는 편도 아니고 분석하며 보는 편도 아니라서, 영화를 느낀대로 쓰는 일기에 가깝겠지만 흥미롭게 보았기 때문에 남기는 기록.
일단 다 보고 일어나면서 웃음이 났다.
첫 번째 이유는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결말을 보고 일어나며 '아우 씨' 나 '괜히봤다' 등등의 찝찝함과 공포감이 섞인 말들을 해서였고 -> 사람들이 진심으로 찝찝하고 불편하게 느낀다는 것이 감독님이 영화를 잘 만들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이유는 포스터 중심에 쓰여진 문구, '절대 현혹되지 마라' 와 영화 안에서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왜 의심하느냐' 가 자꾸 맴돌아서였다 -> 이 영화는 보는 내내 관객들로 하여금 현혹되고 의심하게 만든다.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어 불편한'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거라고 생각한다. 살인으로 시작해서 살인으로 끝나는데다, 심지어 곽도원과 한편으로 보였던 황정민이 시체들을 카메라로 찍는 장면으로 반전까지 쾅쾅 붙여주며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곽도원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딸을 살려보려고 애쓴다.(심지어 초반에 겁쟁이로 비추어졌던 사람이) 그런데도 결국 비극적인 결론이 나면서, 갑자기 닥친 불행 앞에서 발버둥 쳤던만큼 인간의 무력함은 더 진하게 드러난다. 관객들이 느끼는 불편함, 찝찝함은 아마 이 영화 내에서의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장면보다도 영화 내내 드러나는 인간의 무력함으로부터일 것이다. 차라리 곽도원이 정말 시원하게 탓해도 될만한 죄를 저질렀다던가 겁쟁이처럼 아무것도 안했다면, 그의 비극에 그 탓이라도 해보며 속편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가고, 마지막까지 딸을 살려보려고 천우희와 황정민의 말 사이에서 갈등하며 괴로워하기 때문에 그가 집에 돌아와 보게 되는 비극적인 장면에서 우리는 함께 허무해질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결론적으론 천우희의 말을 믿지 못하고(의심하고) 기다리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가서 오는 비극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서 곽도원 탓을 하기는 어렵다. 황정민의 말을 의심하고 천우희의 말을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 그럴만한 이유도 딱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인과 천우희, 황정민 셋 중 누가 이 비극의 주도자이고 누가 나와 한 편인지, 의심할만한 대상을 결정할 근거가 어디있단 말인가. 영화 결론이 나기 전까진 나도 천우희의 말이 정말 사실일지 의심했는 걸. 곽도원이 집에 돌아갔을 때의 결론이 영화 속에 없었다면 끝까지 진짜 악이 일본인인지 황정민인지 천우희인지 단정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관객들로 하여금 누가 진짜 악인지 계속 의심해보도록 영화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천우희는 이 비극이 곽도원이 근거도 없이 의심하기 시작해서부터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사실 매 상황에서 곽도원은 그럴듯한, 그나마 할 수 있는 의심을 해볼뿐이었다. 사람은 자기 의지밖의 상황에서, 자신이 무력해지는 상황에서 믿어버리기라도 해볼 것이 필요해진다. 딸을 살릴 굿이 필요할 땐 유명한 무당이라는 황정민에게 의지해야 하는만큼 그를 믿어보는 것이고, 천우희의 말에 망설이며 닭이 두 번째 울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다가도 천우희 뒤로 떨어져있는 딸의 머리핀을 발견하며 천우희가 범인이었다고 믿게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특정한 것을 의심하고 특정한 것을 믿어버림으로써 자기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해볼 수 없는지 모른다. 하필이면 곽도원이 운도없게, 의지했던 황정민이 반전의 주인공이어서 비극이 비극으로 끝나게 되었을 뿐, 그가 의심하고 믿었던 것들을 탓해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탓할 곳 없는 비극이 우리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의심하지 않아야 했을까'
그 안에서 가장 야속한 것은 천우희의 존재였다. 그녀는 곽도원을 말리며 손도 잡아보고 결국 믿지 못하고 떠날 때 눈물도 흘리는 등 곽도원의 편이었음을 마지막까지 암시해주지만... 생각해보면 그녀가 적극적으로 한 일이라곤 없다. 애초에 적극적으로 곽도원을 돕기라도 했다면 그야말로 곽도원이 의심하지 않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천우희의 일본인을 추격하는 등의 활약은 숨져져있고(특히 곽도원앞에서) 정말 곽도원의 딸을 살려주고 싶었다면 그 정도로밖에 곽도원을 설득할 수 없었을까 싶은. 그녀가 얼마나 활약한 게 없으면, 황정민이 일본인이 아니라 그 여자가 범인이라고 말할 때 우리도 그 말에 현혹되겠는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영화에서 나는 그녀의 그런 비적극성과 곽도원이 찾아갔었던 신부님의 모습이 종교에 빗대어 느껴졌다. 신부님은 정작 '보이지 않는 신'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분이면서 곽도원이 의심되는 상황들을 설명할 때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믿냐'며 다그치고 의사들에게 맡겨보라고 말한다. 매우 수동적이다. 이 영화속에서 천우희가 주는 느낌도 비슷하다. 천우희는 곽도원의 가족이 위기에 처한 영화 끝에 다다르기까지 다시 곽도원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으면서, 결론은 마치 천우희가 말하는대로 곽도원이 믿지 않아 비극으로 끝나는 것처럼 돌아간다. 딱히 믿어야할만한 근거란 것도 없었는데, 믿지 않은 곽도원의 탓이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딱히 직접 나타나서 뭔가를 도와주는 것 같지도 않지만, 그저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하는 종교가 생각나는 건 나뿐인가.(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도와주고 있는지는 몰라도 보이지 않으면 믿기도 힘들뿐이다)
'왜 하필 그 불행은 나에게'
갑자기 시작된 연쇄살인과 의문의 이방인.(일본인) 이 영화에서 나는 누가 진짜 악이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갑자기 시작된 불행 안에서의 사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았던 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이유모를 불행 앞에서 묻게 된다. 왜 하필 나이냐고. 왜 나이어야 했느냐고. 이 영화에서 황정민은 낚시에 비유해 그저 뭐가 걸릴지도 모르고 던진 낚싯줄에 걸리듯이 누군가 운없게 불행에 걸린 것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천우희는 곽도원이 의심을 했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놓는다.(여기서 곽도원은 자신이 먼저 의심한 게 아니라 딸이 먼저 아프기 시작했기 때문에 의심하게 된 것 아니냐고 분통해한다) 사실 진짜 인생에 있어서의 불행은 낚시에 걸린 것처럼 비유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유를 찾을 수 있을 자업자득인 불행들도 많지만, 그런 불행들엔 딱히 왜 나이냐고 물을 이유도 없는 것이고. 인생에서의 진짜 불행은 '왜 나이냐고' 소리쳐도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는, 그런 불행이다. 그렇게 불행이 오는 게 인생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은 곽도원에게 비극이 온 이유를 황정민과 천우희가 내놓은 두 가지 답 중 무엇이 맞다고 생각할지.
나는 설령 천우희의 말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황정민의 말을 더 밀어주며 곽도원의 억울함 편에 서주고 싶다. 물론 곽도원이 자신의 딸이 아프기 전부터, 일본인에 대한 소문거리를 들으며 혹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맞다. 그런 그의 마음을 보여주듯이, 일본인에 대한 소문을 듣고부터 빨간 눈에 육식하는 괴물같은 사람이 나오는 악몽을 자주 꾸기도 한다. 직접 목격하지 않았아도 그 의심이 그의 딸이 아프기 시작하고 일본인의 집에서 딸의 실내화가 나오면서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가지만. 그렇게 의심을 시작하고 의심하는대로 믿어버리게까지 되는 과정은 사실 너무나도 어색함이 없었다. 그게 우리들의 모습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속에서 곽도원이 유난히 의심을 많이 하는 히스테리적인 인간이 아니라, 너무나도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 중 하나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는 '현혹되지 마라'는 말을 자꾸 하지만, 곽도원을 통해 정말 현혹되었던 문제보다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받아들여보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하필 온 불행은 끝까지 곽도원을 놓아주지 않고 냉정하기만 하다.
영화가 끝나면서 바로 깨달아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곽도원처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그 영화의 주인공이었어도 곽도원과 같았으리라는 것을. 동료경찰의 일본인 이야기를 믿어보다가 천우희의 목격담을 믿어보다가 황정민의 말을 믿어보다가 천우희의 말에 흔들리다가 결국 딸의 머리핀을 보며 황정민의 말을 다시 믿어보게 되는, 의심으로만 이어지는 과정. 물론 영화 곳곳에 누가 실제 곽도원의 편에 서있는지 암시하는 힌트들은 있다. 황정민이 옷을 갈아입을 때나 사람 물어뜯는 일본인의 사나운 개나 황정민이 굿을 할 때 괴로워하는 딸을 보여주는 장면 등. 하지만 그 근거들조차 의심의 근거들일 뿐이다. 마지막에 동굴 안에서 일본인이 악마의 형상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동굴 안에서 일본인은 칼을 들고 찾아온 것을 보며 자신에 대한 의심(악마일거라는 거의 확신)을 즐거워하는 듯 보인다. 사실 의심이라는 것은, 안좋게 여겨진다. 근거없는 의심이라는 것들은 억울하고 부정적인 수많은 결과들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저 의심에서 시작된 소문 하나가 퍼져서 진짜처럼 되어버리고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기도 하는 것처럼. 의심이 오해로 번지고 그게 또 싸움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의심하는 일을 경계하기란 의심하지 않는 일보다 더 어렵다. 특히 편안한 상황보다는 힘든 상황에서 그렇다. 의심하는 일이 때론 나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어 수단이기도 하고, 무력한 상황에서 취해보게 되는 나름의 노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곡성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이, 살아가며 그런 어쩔 수 없음에 우리가 내게 되는 소리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