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씹기/정신의학
애도예찬 中
바나나색우산
2016. 4. 10. 16:15
데리다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애도도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애도는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고, 그래서 애도에 완성이나 종결은 없는 것. 애도는 실패해야, 그것도 "잘 실패해야" 성공한 것이라고 한다. 데리다의 말처럼, 사랑했던 사람을 잃은 슬픔에는 끝이 없어야하며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애도일지 모른다. 그러니 내가 애도에 관해 쓴 일련의 글은 죽음이나 상실 이후에도 계속되는 이상적인 사랑, 사랑의 이상, 공존과 연속에의 그리움에 관한 글이다. 달리 말하면 애도에 대한 예찬인 셈이다.
애도는 말로 할 수 없던 슬픔을 말로 표현하면서, 즉 언어의 영역으로 끌어오면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면, "타인의 죽음"은 그래서 늘 "첫 죽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하나하나는 우리에게 늘 "첫 죽음"인 것이며, 우리는 매번 그 "첫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해한다. 죽음에는 학습효과가 없는 셈이다.
부재하는 자가 부재한다고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애도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애도일 수 있다는 역설이 여기에서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정신분석이론에서 중요한 건 언제나 살아남은 쪽이다.
그래서 애도에 관한 정신분석이론은 인간의 이기적인 생존본능을 전제로 한다.
"고정된 곳 없이는, 확정할 수 있는 장소 없이는, 애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데리다의 말인데, 더 쉽게 말하면 무덤이나 비석 등과 같은 것이 있어야만 애도가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무덤이나 비석과 같은 물질은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 즉 비물질로 넘어가는 다리다. 그것마저 없다면 우리는 슬픔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익사해버릴지 모른다.
애도란 결국 다른 게 아니라 몸에 의한, 몸을 위한, 몸의 애도이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안티고네처럼 몸에 집착하는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