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씹기/에세이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바나나색우산
2016. 4. 6. 12:45
슬픔이란 뭔가 새로운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이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우리의 감정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고 우리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은 뒤로 한 발 물러나 거기에 고요가 생겨나며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것이 그 가운데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온갖 슬픔은 긴장의 순간인데 우리들은 그것을 오히려 마비로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고독합니다. 다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거나 행동할 뿐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승화되고 심화된 홀로됨입니다. 사랑이란 자기 내부의 그 어떤 세계를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들어 가는 숭고한 계기입니다.
당신은 진정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진정 깨어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진정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안도하는 것입니다. 치유란 늘 고통스러운 것이니까요. 그것은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아무도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편견과 기대라는 관념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누구도 신뢰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할 따름입니다.
물론 엄마는 충분히 불행했음에도 변화하기가 두려웠단다. 왜냐하면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은 미지이기 때문이지. 설사 여기서 괴로움이 있다 해도 그것이 내가 아는 것이라면 그게 더 나았던 거야. 설사 저 너머에 행복이 있다 해도 우리는 선뜻 나아갈 수가 없으니가 말이야.
고통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고통과 작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 고통을 놓아버린 후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냉소적인 것, 소위 쿨한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글을 쓸 때에도 어쩌면 그게 더 쉽고, 뭐랄까 문학적으로 더 멋있게 꾸미기도 좋아. 그러나 그렇게 사는 인생은 상처는 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다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더욱 황당한 것은 상처는 후회도 해보고 반항도 해보고 나면 그 후에 무언가를 극복도 해볼 수 있지만 후회할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의 공허는 후회조차 할 수 없어서 쿨하다 못해 서늘해져버린다는 거지. 네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길을 걷다가 문득 돌아보니, 네 인생 전체가 쿨하다 못해 텅 빈 채로 '서느을' 하다고 생각을 해봐. 네가 엄마 앞에서 '으악!'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구나. 그래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그건 분명 상처는 아니지만 그건 공포라고. 엽기라고, 말이야. 상처는 분명 아픈 것이지만 오직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세상을 냉랭하게 살아간다면 네 인생의 주인 자리를 '상처' 라는 자에게 몽땅 내주는 거니까 말이야. 상처가 네 속에 있는 건 하는 수 없지만, 네가 상처 뒤에 숨어 있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
우리 모두는 늘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배심원 석에 앉혀 놓고, 피고석에 앉아 우리의 행위를 변명하고자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들은 사건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사건에 대한 표상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죽음이 끔찍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상이 끔찍한 것이고 깨어진 꽃병 자체가 끔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과 꽃병을 동일시하여 꽃병이 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온 마음으로 꽃병에 집착하는 것이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돈은 꼭 필요하며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상처를 입힌다.
사랑이 상처를 허락한다는 엄마의 말은 속수무책으로 상처 입는다는 말이 아닌 것을 너도 알 거야. 상처를 허락하기 위해서는 상처보다 네 자신이 더 커야 하니까. 허락은 강한 자가 보다 약한 자에게 하는 거니까 말이야.
가끔 시라는 것이 이토록 사람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어쩌면 돈도 안 되고 어쩌면 성적에도 소용이 없고, 어쩌면 세상에서 그것들이 다 사라진대 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순간에 시는, 홀로 숨어 우는 가을 귀뚜라미처럼 조그맣게 존재하면서 우리의 가장 여린 부분을 어루만진다.
바람이 거세다는 사실보다 바람이 거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더 힘들다는 것을 엄마는 절감하며 산다. 사람이 저마다 외롭다는 사실보다 사람이 저마다 외롭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더 힘든 것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