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색우산 2016. 7. 17. 11:22

 

- 나희덕 -

 

 

 

길 아닌 곳에 이르러 그대는 몸을 눕혀 나의 길이 된다

한 발 디뎌 서면 이미 길이 아니기도 한 신기루,
나는 멀리 달아나 박쥐들이 사는 광야로 바위 밑으로

그대가 날 시험하려는가 보리떡 한 덩이로 저 거친
광야를 푸른 보리밭으로 만들 수 있노라고, 그러 믿고
기다린다면 그 위로 풍성한 새떼를 놓으리라고

희망의 그물 던지며 기다리는데, 땀 흘려도 길은 자꾸

희미해지고 수많은 햇살이 들어박힌 과녁처럼 그을리고

상처난 사람들이 돌아온다, 그들의 고단한 눈썹 위로

어디 길이 보이나

길 없는 곳에 이르러 마침내 그대는 가시밭에 몸을
눕혀 그들의 길이 된다 보리떡 깨물며 부르는 노래 있어

엎드려 길이 되는 사람들 속에 보리밭 푸르러가고,
이제는 내가 길이 된다 광야에서 마을까지 닿아 있는
멀고도 가까운 길이